집단주의 vs 개인주의 [고양이 눈썹 No.45]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9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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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020년 10월
▽인간은 무리생활을 합니다. 수렵 채집 시절을 거쳐 농경이 시작되자 무리생활은 더 커졌습니다. 가족이나 부족 단위의 무리는 정착을 하며 마을 공동체로 커집니다.

특히 동아시아의 벼농사는 더욱 집단생활이 중요합니다. 혼자서는 농사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벼농사의 핵심은 물 관리. 홍수나 가뭄 모두 벼농사에는 치명적이죠. 대규모 축조공사를 통해 저수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천변엔 둑을 쌓아야 합니다. 대규모 토목 공사에는 많은 인원이 동원되고, 그러면서 위계질서와 권력이 드러납니다.

제방을 쌓은 뒤엔 윗 논부터 그 물을 받습니다. 물꼬는 집단생활에서 무척 중요합니다. 물꼬를 얼마나 잘 터주느냐에 따라 윗물을 받을 수 있고, 비가 많이 올 때 물꼬를 너무 열면 아랫 논은 물난리가 납니다. 물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 십상이니 집단의 갈등 조정이 중요해집니다.

2020년 1월
2020년 1월
▽모내기와 가을걷이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민족의 품앗이와 두레가 생긴 이유입니다. 쌀은 면적 대비 열량(칼로리)이 높은 곡물입니다. 남미가 원산지인 고구마가 가장 높지만 17세기에나 아시아에 보급됐고 보관 기간이 짧아 주식이 아닌 구황식물로 자리 잡았죠. 쌀은 1㏊당 생산량이 밀보다 2배 가까운 약 1500㎏입니다. 농업 효율이 좋은 대신에 일손이 많이 필요합니다. 볍씨를 미리 모(벼의 싹)로 키워놓아야 하며, 심을 때도 하나하나 손으로 모내기를 해야 합니다. 여름엔 물을 잘 대줘야 하고 거의 매일 잡초를 뽑아야 합니다. 노동집약적이죠. 많이 모여 살수록 유리합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농촌에 인구가 많았던 이유입니다. 집단이 점점 더 중요해집니다.

밀은 쌀에 비해 열량은 10% 가량 낮지만 재배하기 편합니다. 모내기도 없습니다. 씨를 그냥 밭에 뿌리면(파종) 되니까요. 가을에 파종해 늦봄이나 초여름에 수확하니 잡초나 벌레를 피하기 유리합니다. 밀 재배 지역이 벼 재배 지역보다 집단주의 성향이 낮은 이유로 설명이 되려나요?

2022년 5월
2022년 5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일부 맞는 말입니다. 창의성을 위해 기업들은 회사 인테리어 바꾸고, 다른 부서사람들을 우연히 만나도록 동선을 짭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공간보다는 경제활동과 생산, 분배방식에 더 큰 지배를 받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죠. 후기 산업사회 이후에는 ‘직업병’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직업이 다양해지고 전문화 분업화되며 다른 직업군에는 없는 독특한 문화가 생겨서겠죠. 의식이 경제활동에 지배를 받는다는 방증입니다. 그렇게 보면 동아시아의 집단주의는 아무래도 벼농사와 관계가 큰 것 같습니다. 중상주의와 산업혁명이 일찍 시작된 서구는 개인주의가 상대적으로 일찍 꽃피웠고요.

2022년 5월

▽이제 쌀농사는 거의 100% 기계농업입니다. 모내기는 이앙기가 하고 추수는 콤바인이 합니다. 제초제는 드론으로 뿌립니다. 추수가 끝나면 트랙터로 흙을 뒤집고요. 개인도 얼마든지 기계의 힘을 빌려 혼자 벼농사를 할 수 있습니다. 농촌도 마을공동체의 결속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죠. 예전엔 이웃의 농기구 상태를 훤히 알고 있어야 도움을 받았으므로 ‘옆집 숟가락 개수도 안다’는 말이 나온 것일 테고요.

2021년 4월
2021년 4월

▽도구(기계)가 진화함에 따라 집단 경제 활동은 줄어듭니다. 물론 여전히 협업과 ‘콜라보’ 등 단합과 팀워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전에 마을 공동체 수 백 명이 시시때때로 동원된 생산 활동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회사의 팀워크도 주로 10명 내외로 이뤄집니다.

개인주의와 다원주의가 대세가 됩니다. 평등이 기본 원칙이라 서열과 집단에 기반한 공동체 유지는 더 위협을 받습니다. 이제 국가와 사회의 근간은 집단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어떻게 세우느냐, 그리고 개인들을 어떻게 느슨하면서도 결속력 있게 유지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개인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공동체가 안전하게 유지·운영될까요? 개인주의는 개인들의 개별화·세분화와 구별돼야 합니다. 개인들의 단절을 의미하니까요.

다원화·다양화가 답이 아닐까요. 개인들이 각각 독립해 존재하되, 평소 느슨하게 연결돼 있다가도 위기 상황에선 효율적으로 동원될 수 있게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걸핏하면 총동원령이 내리던 독재시대와는 달리 중심축, 이른바 집단주의의 허브는 약해져야 합니다. 다른 개인들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문화가 퍼져서는 곤란합니다. 상호 존중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요즘 유행하는 혐오 표현들이 걱정입니다.

드라마 스틸컷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최수연’이란 캐릭터가 있습니다. 특별히 착하지도, 특별히 악하지도 않은 우리네 보통 캐릭터가 아닐까 합니다. 우영우에 대해 ‘어차피 1등’이라며 샘내다가도 곤란을 겪으면 투덜대며 도와줍니다.

최수연이 보여준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는데요, 엄마 없이 자란 우영우가 엄마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하소연하자 아무 말 없이 그냥 옆에 있어줍니다. 어설픈 공감이나 대꾸도 없이 그냥 옆에서 들어만 줍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내지는 않죠. 마치 엄마 노릇을 하듯 우영우를 백화점 의류매장으로 끌고 가 옷을 골라줍니다.

개인주의 사회에선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선을 넘으면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타인과 사회에 너무 무관심해서도 안 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같았습니다.

신원건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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