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만 삼켜온 딸 이름 불렀더니… 응어리가 풀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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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실종자 가족 심리치료 ‘변화의 5주’

19일 서울 동대문구 실종자가족지원센터에서 열린 ‘제2회 실종자가족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장기 실종자 가족들이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달 12일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5회에 걸쳐 진행된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일 서울 동대문구 실종자가족지원센터에서 열린 ‘제2회 실종자가족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장기 실종자 가족들이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달 12일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5회에 걸쳐 진행된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집 앞에도 나가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집에서 100m, 200m 조금씩 멀리 나가는 연습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구 용두치안센터 2층 ‘경찰청 실종자가족지원센터’에서 김성원 씨(77)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 씨는 10월 31일부터 매주 목요일 이 센터에서 다른 실종자 가족 9명과 함께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그간 “할 말이 없다”며 질문을 피해왔다.

김 씨는 42년 전 당시 여섯 살이었던 아들 만호 군을 잃어버린 뒤 세상과 벽을 쌓았다. 그날은 1977년 5월 28일 토요일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놀러 나간 아들은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만호 군과 놀던 아이들은 “어떤 할아버지가 만호를 데려갔다”고 말했다. 나고 자라 수십 년을 지낸 곳에서 이웃이 만호 군을 데려갔을지 모른다는 불신이 김 씨의 마음속에서 커졌다. 가족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집에서도 입을 닫았고 집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 했다. 그런 김 씨가 심리치료 프로그램 마지막 날 먼저 입을 연 것이다. 김 씨는 “이젠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고 싶습니다. 남도 끝에도, 독도에도 가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찰청은 김 씨처럼 가족이 실종된 지 30년이 지난 장기 실종자 가족 10명을 대상으로 10월 31일부터 지난달 28일까지 5회에 걸쳐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경찰이 실종자 가족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프로그램을 이끈 서울 성동경찰서 청문감사관실 소속 이효정 경장 등과 함께 실종자 가족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기록했다.

○ 41년 만에 딸 이름 부르니 응어리 풀려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백명자 씨(68·여)를 이달 17일 실종자가족지원센터에서 만났다. 백 씨는 기자에게 전단을 건넸다. 41년 전 잃어버린 딸 김선영 양(실종 당시 3세)의 사진과 신체 특징이 적혀 있었다. 백 씨는 프로그램이 끝난 뒤 전단 500장을 새로 뽑았다고 한다. 백 씨가 딸의 전단을 뽑은 건 13년 만이다.

백 씨에게 선영 양의 이름은 금기어였다. 집 앞에서 놀던 첫딸 선영 양이 눈 깜짝할 새 사라진 건 1978년 11월 26일 일요일이었다. 백 씨는 만삭의 몸으로 선영 양을 찾아 헤맸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2주 뒤 출산을 하자마자 다시 선영 양을 찾아 집 밖으로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둘째 딸이 젖을 먹지 못해 입이 바짝 말라 있었다. ‘둘째 딸을 살리려면 선영이는 가슴에 묻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한 백 씨는 그 후로 선영 양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가족에겐 밝은 모습만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고 ‘웃음치료사’ 과정도 수료했다. 첫딸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해 매일 수면제를 먹는다는 사실은 가족에게 숨겼다.

그랬던 백 씨에게 변화의 순간이 찾아왔다. 네 번째 심리치료가 진행된 지난달 21일. 잃어버린 가족에게 그림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백 씨는 A4 용지에 선영 양의 얼굴을 채웠다. “선영아, 오랜만이야. 잘 살고 있지?” 다른 실종자 가족 앞에서 편지를 낭독하는 그 시간은 백 씨가 41년 만에 처음으로 선영 양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이었다.

백 씨는 “그동안 다른 가족의 행복을 위해 선영이를 애써 잊으려 했는데, 오히려 그랬던 내 모습이 선영이에게 미안해서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고백했다. 백 씨는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선영이가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속으로만 삼켜온 ‘선영이’라는 이름을 시원하게 뱉고 나니 응어리가 풀렸다”고 했다.

○ 가족에게 처음 전하는 진심, “고마워요”

실종자 가족들이 닫힌 마음을 열기까지는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공감을 보인 상담 경찰관들의 노력이 있었다. 두 번째 심리치료 프로그램이 진행된 지난달 7일이 그랬다. 실종자 가족 10명에겐 찰흙이 주어졌다. 원하는 모양으로 빚어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45년 전 당시 세 살이던 아들 이정훈 군을 잃어버린 전길자 씨(72·여)는 찰흙으로 둥근 원반을 만들었다. 원반 가장자리에는 뾰족한 막대 10여 개를 꽂았다. 이 경장은 전 씨 옆으로 다가가 “울타리를 만드는 거냐”고 물었다. 전 씨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아무 생각 없이 찰흙을 만지고 있었는데, 그 질문을 들으니 정훈이가 못 나가게 막으려고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경장은 전 씨가 만든 울타리에 검지가 들어갈 정도의 빈틈이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이 경장이 전 씨에게 “여기는 왜 열려 있느냐”고 묻자, 전 씨는 “내가 갇혀 있으면 남아 있는 가족을 돌볼 수 없다”며 “문이 조금은 열려 있어야 가족도 만나고 정훈이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경장의 질문이 실종자 가족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지난달 7일 실종자가족지원센터에서 열린 ‘제1회 실종자가족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길자 씨(왼쪽)와 이자우 씨. 이들은 찰흙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달 7일 실종자가족지원센터에서 열린 ‘제1회 실종자가족 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한 전길자 씨(왼쪽)와 이자우 씨. 이들은 찰흙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32년 만에 처음으로 남아 있는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참여자도 있었다. 1987년 당시 생후 7개월이었던 한소희 양을 잃어버린 이자우 씨(60·여)는 지난달 7일 “내일이 남편 생일”이라며 찰흙으로 알록달록한 생일 케이크를 만들었다. 이 씨는 “나는 평생 나를 탓하며 살았는데 남편은 단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살았다”고 했다. 이 경장은 이 씨에게 “오늘 남편에게 ‘고맙다’는 진심을 전해보자”고 했고, 이 씨는 약속을 지켰다. 이 씨는 이날 남편과 저녁식사를 하며 “그동안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말을 건넸다. 남편은 말없이 웃으며 이 씨를 바라봤다고 한다.

지난달 28일 제1회 실종자 가족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마친 경찰은 이달 12일부터 다른 실종자 가족 10명을 대상으로 제2회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내년부터 해외입양 한인 DNA로 실종가족 찾는다

장기 실종자 가족들에게 잃어버린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경찰청은 지난달부터 ‘한인혼혈입양인연합’과 함께 장기 실종자 가족과 해외 입양인의 유전자(DNA)를 분석하고 있다. 실종자 가족이 센터를 통해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면 입양인연합이 이들을 대상으로 입안 세포를 채취해 미국 내 유전자 분석기관에 맡겨 경찰에 결과를 알려주는 식이다.

지난해 12월 구모 씨(62·여)는 39년 전 잃어버렸던 딸을 찾았다는 전화를 받고 울먹이며 “하느님이 제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셨다”고 말했다. 2017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양인연합에 자신의 유전자를 등록해뒀는데, 미국에 거주하는 입양인 안드레아 김 씨(39)가 구 씨의 친딸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온 것이다. 올 5월 1일 한국을 방문한 김 씨는 구 씨에게 카네이션을 건넸다.

구 씨 모녀처럼 수십 년 만에 기적처럼 상봉하는 실종자 가족과 해외 입양인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경찰청은 내년 1월 1일부터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무연고 아동이 친부모를 찾는 경우 14개국 소재 현지 재외공관 34곳을 통해 유전자를 채취·등록하는 서비스를 실시한다. 해외 입양인이 현지에서 유전자를 채취하면 경찰청이 보관하고 있는 실종자 가족 유전자 데이터베이스(DB)와 대조해 일치 여부를 확인하는 식이다.

18일 실종자가족지원센터에서 만난 김길순 씨(71·여)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김 씨는 최근 이곳에서 구강 유전자를 채취해 분석을 맡겼다. 김 씨는 “42년 전 100일도 지나지 않은 딸을 잃어버리고 평생을 찾아 헤맸다”며 “이제는 내 딸 시내가 나를 찾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장기 실종자 가족#실종자가족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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