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복도 위 가스관, 묶인 소화기… ‘런던 화재’ 남의 일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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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노후아파트 참사… 국내 40년 넘은 3곳 점검해보니

15일 서울 중구의 40년 이상 된 아파트에서 소방전문가와 중부소방서 관계자가 안전점검을 하고 있다. 이 아파트는 10년 
이상 된 소화기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나무 현관이나 복도 곳곳에 쌓아둔 폐가구 등은 여전히 위험 요소로 지적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5일 서울 중구의 40년 이상 된 아파트에서 소방전문가와 중부소방서 관계자가 안전점검을 하고 있다. 이 아파트는 10년 이상 된 소화기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나무 현관이나 복도 곳곳에 쌓아둔 폐가구 등은 여전히 위험 요소로 지적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아파트 1층에서 불이 났습니다. 빨리 대피하세요.”

동행한 전문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파트 비상 대피로를 찾아 내달렸다. 볕이 들지 않는 복도는 어두침침했다. 야광으로 된 유도표지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복도 곳곳에는 자전거와 가구 문짝 등이 방치돼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피해야 위층으로 갈 수 있었다. ‘실제 상황’이 아닌데도 진땀이 났다.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교수(소방방재학과)는 “만약 한밤중 진짜로 불이 나 정전까지 된다면 이런 물건에 부딪혀 대피하기 힘들 것”이라며 “대부분 가연성 물질로 된 물건이라 화재 때 ‘불쏘시개’ 역할까지 해 더욱 위험했다”고 말했다.

지은 지 43년 된 영국 런던의 24층짜리 아파트에서 일어난 화재로 최소 10여 명이 사망하면서 국내 노후 건축물도 예외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본보 취재진은 박 교수와 함께 지은 지 40년 이상 된 서울의 노후 아파트 3곳을 긴급 점검했다.

○ 화마 닥치면 소방차도 무용지물

15일 서울 중구의 한 10층짜리 아파트. 1970년 완공됐다. 불이 난 런던 ‘그렌펠타워’보다 4년 앞선다. 350가구 규모지만 리모델링을 앞두고 현재는 70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이 아파트엔 층별 방화벽이 없다. 아래층에 불이 나면 위쪽으로 급속히 번져 대형 참사로 이어질 위험성이 크다. 복도 위로 가스관이 지나가고 건물 외벽엔 낡은 전선줄이 뒤엉켜 있다. 불이 나면 모두 ‘시한폭탄’으로 변할 수 있다.


노후 아파트의 화재 위험성은 모두 비슷했다. 화재에 취약한 낡은 건축 자재가 여전히 많고 소방 설비도 취약했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한 아파트는 1930년대 완공된 5층짜리 아파트다. 아파트 안 곳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시 생명을 지켜줄 최후의 수단인 안전장치가 없었다. 소화전에는 비상등이 파손된 채 방치돼 있었다. 소화기는 도난 방지를 위해서인지 쇠줄로 묶여 있거나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스프링클러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옥상으로 가는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한 주민은 “믿을 건 소화기밖에 없는데 확인해 보니 사용기한이 지나 있었다. 관리실에 교체를 요청했지만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40년 이상 사용 건축물은 15만5988동으로 전체 건축물의 25%에 달한다. 박 교수는 “당장 시설 보강과 법 개정이 어렵다면 화재 발생 시 대응 매뉴얼을 철저히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상 대피로나 비상구 위치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지만 노후 아파트 주민들은 화재 발생 시 대피를 위한 안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주민은 “구청에서 실태조사를 나왔는데 건물 벽체만 뜯어보고 아무 조치 없이 그냥 갔다”며 “화재 대피와 관련한 안내도 받지 못했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 초고층 건물도 불안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초고층 건물도 문제다. 국내 30층 이상 고층 건물은 3266개 동이다. 50층 이상이거나 높이가 200m 이상인 초고층 건물은 107동이나 된다. 최근 3년간 고층 건물 화재는 2014년 107건에서 지난해 150건으로 늘었다. 올해 6월 현재 57건이 발생했다. 2월엔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의 66층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인 메타폴리스 단지 내 상가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4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다치기도 했다.

국민안전처는 런던 아파트 화재를 계기로 30층 이상 고층 건축물의 긴급안전점검을 실시한다고 15일 밝혔다. 긴급안전점검은 소방시설과 피난·방화 설비, 건축 외장재뿐만 아니라 가스 및 전기 설비도 포함된다. 긴급안전점검 대상에 포함되는 고층 건물 중 아파트가 2701곳이다. 전체 82.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최창식 한양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당장 사고 예방을 위해선 현장에서 재난 대응 매뉴얼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지 당국이 확인해야 한다”며 “사고 발생 후 책임을 묻는 성격의 처벌보다 미흡한 예방과 대비를 처벌하는 쪽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김배중 wanted@donga.com·신규진·정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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