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金’을 캐는 탄광촌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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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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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태백 초중생 14명, 훈련장 없어 도로서 스키 연습하지만 “우리가 미래의 국가대표”

4년 만에 꼴찌서 최고로…어려운 여건 속에도 강원 태백시교육청연합스키팀 초중학교 선수들은 활기가 넘친다. 19일 강원 평창군 알펜시아리조트에서 훈련하던 선수들이 스키와 폴을 높이 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태백시 통리초등학교생 6명과 황지중학교생 8명으로 구성된 태백시교육청연합스키팀 선수들은 창단 4년 만에 꼴찌에서 최고가 됐다. 평창=원대연 기자
4년 만에 꼴찌서 최고로…
어려운 여건 속에도 강원 태백시교육청연합스키팀 초중학교 선수들은 활기가 넘친다. 19일 강원 평창군 알펜시아리조트에서 훈련하던 선수들이 스키와 폴을 높이 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태백시 통리초등학교생 6명과 황지중학교생 8명으로 구성된 태백시교육청연합스키팀 선수들은 창단 4년 만에 꼴찌에서 최고가 됐다. 평창=원대연 기자
겨우내 흰 눈 위를 달리느라 새까맣게 탄 얼굴, 여기에 싸구려 검은색 운동복까지 입었다. 다른 팀 선수들은 이렇게 놀렸었다. “너희는 탄광촌에서 온 ‘탄광팀’이라서 운동복도 검으냐?”

19일 강원 평창군 알펜시아 스키장에서 열린 전국학생스키대회 크로스컨트리 경기. 강원 태백시 통리초등학교와 황지중학교의 태백시교육청연합스키팀 선수들이 하얀 눈밭을 달려 결승선에 들어왔다. 영하 10도의 날씨에 입가에는 콧물이며 침이 하얗게 얼어 서리가 내렸다. 전날 크로스컨트리 클래식 초등부 3km에서 최진규 군(13·통리초교 6학년)이 1위에 오른 데 이어 이날은 우경진 군(13·통리초교 6학년)이 프리스타일 4km에서 11분57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이로써 통리초등학교는 크로스컨트리 초등부 4개 부문에서 금메달 3개(클래식·프리스타일·복합)와 은메달 1개(계주)를 휩쓸었다.

사방에 눈밭이 펼쳐진 강원 태백에서 나고 자란 통리초등학교, 황지중학교 선수들은 4년 전만 해도 스키장은 구경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전교생이 70여 명뿐인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마라톤을 하던 아이들, 유니폼이 탐이 났던 아이들, 형 따라 온 아이들은 스키부에 들었다. 경진 군은 비탈을 시원하게 내려오는 알파인스키를 타는 줄 알고 팀에 들어왔다가 훈련 내내 스키를 신고 오르막길만 걷는 걸 보고는 ‘아차’ 싶었다.

3년 전 ‘탄광팀’이 처음 스키대회에 출전했을 때, 경기 마지막 날 3팀이 출전한 크로스컨트리 계주 경기에서 3등 메달을 딴 것 외에는 입상하지 못했다. 태백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김영갑 코치(34)는 아이들과 “3년 뒤에는 우리 최고가 되자”고 약속했다. 꿈은 이뤄졌다. 이달 초 열린 전국동계체전에서 통리초등학교는 크로스컨트리 4개 종목에서 금메달 3개를, 황지중학교는 은메달 2개를 땄다. 이변이었다. 통리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 지금은 황지중학교에 진학한 중학생 8명에 통리초등학교 학생 6명이 ‘탄광팀’이다. 선수 14명 가운데 6명의 아버지가 태백 탄광에서 일한다.
‘탄광팀’ 놀림받던 그들… “모태범 형처럼 성공할래요”

코치님, 우리 코치님
선 수시절 무릎 다쳐 스키 못타
운동화 신고라도 함께 달려
학생들 ‘코치 열정’ 믿고 따라

꿈꾸는 아이들
이 웃학교서 장비 빌려 훈련
창단 4년만에 전국대회 석권
내일을 위해 오늘도 굵은 땀


19일 강원 평창군 알펜시아 스키장에서 열린 전국학생스키대회 크로스컨트리 경기가 끝난 뒤에도 태백시교육청연합스키팀 선수들은 피곤함을 잊고 오후훈련에 나섰다. 앞쪽의 통리초등학교 6학년 최진규 군은 크로스컨트리 초등부 클래식, 복합 부문 2관왕에 올랐다. 평창=원대연 기자
19일 강원 평창군 알펜시아 스키장에서 열린 전국학생스키대회 크로스컨트리 경기가 끝난 뒤에도 태백시교육청연합스키팀 선수들은 피곤함을 잊고 오후훈련에 나섰다. 앞쪽의 통리초등학교 6학년 최진규 군은 크로스컨트리 초등부 클래식, 복합 부문 2관왕에 올랐다. 평창=원대연 기자
주장 김창현 군(16·황지중 3학년)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꿈꾼다. 캐나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모태범 이상화의 활약이 자극이 됐다. “스피드스케이팅만 해도 크로스컨트리처럼 관심 밖에 있던 종목이었잖아요. 언젠가는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어요.” 올해도 좋은 성적을 거둔 만큼 국가대표 후보팀에 선발되는 게 목표다. 모태범 이상화의 활약상을 지켜본 김 코치는 아이들이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상상을 해본다.

○ 탄광촌 아이들, 스키를 신다

탄광팀은 2006년 창단됐지만 이듬해 김영갑 코치가 통리초등학교에 오면서 본격적으로 꾸려졌다. 스키부가 있는데 코치 자리가 비었다는 말에 태백을 찾았던 김 코치는 처음에는 ‘괜히 왔나’ 싶었다. 명색이 스키부 선수인데 아이들은 달리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체육대회 때 스키부 아이들이 반 대표로 뛰지 못하고 뒤에서 응원만 하는 겁니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체력훈련에 스키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처음엔 갑갑했습니다.” 김 코치는 학교에 오자마자 선수를 찾으러 다녔다. 육상부 주전인 최진규가 눈에 띄었다.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도 펄쩍펄쩍 뛰는 아이였다. 진규는 어머니가 안 계신다. 농사를 짓는 아버지와 형, 세 식구가 낡은 집에서 함께 산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김 코치는 진규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체격을 키워야 하는데 밥을 제때 못 챙겨 먹이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지난해 입단한 임명철 군(14·황지중 1학년)은 지난해 가을 운동이 너무 힘들어 관두려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을 하다 왼손 검지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아버지는 저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이것도 못 버티나’ 하는 생각에 명철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 내복 껴입고 헐렁한 부츠 신고 훈련

“처음에 너무 배고팠거든요. 지금은 유니폼도 있고 부러울 게 없어요.”

김코치가 부임한 2007년 가을 탄광팀 선수들의 행색은 초라했다. 스키가 부족해 김 코치 모교인 평창 진부초등학교 스키부에서 장비를 빌려다 썼다. 스키 밑바닥에 홈이 파여 ‘빨래판 스키’라고 부르는 초보자용 스키도 탔다. 선수지만 별 수 없었다. 빌려온 스키 부츠 사이즈는 제각각이었다. 부츠가 너무 작아 뒤꿈치가 다 까져 피가 흘렀다. 발톱이 빠지기도 했다. 헐렁해 부츠 안에서 발이 제 맘대로 놀았다. 운동복이 없어 아이들은 내복을 껴입었다. 소매 끝으로 삐져나온 내복을 보면서 김 코치는 마음이 아팠다. 김 코치는 월급 120만 원을 몽땅 쏟아 부은 것도 모자라 집에서 돈을 가져다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였다.

겨울 스포츠지만 여름에는 고된 체력훈련이 이어졌다. 의료용 고무줄을 나무에 묶은 뒤 팔로 잡아당겨 근력 운동을 했다. 축구공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올라타면 균형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 눈이 없는 여름에는 스키 대신에 바퀴가 달린 롤러 스키를 탔다. 매끄러운 아스팔트를 달려야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매년 여름 김 코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태백산 국립공원을 찾았다. 오가는 차량이 드문 매표소 옆에 난 아스팔트 위에서 김 코치는 차량을 통제하고, 선수가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동안 도로 밑에 있는 아이들은 차가 오는지 망을 봤다. 학기 중에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3시간씩 체력훈련을 했다. 하루에 20km씩 달렸다. 겨울방학이면 스키리조트를 찾아 100일씩 합숙훈련을 했다. 아이들은 고된 훈련에 그만두고 싶어질 때도 많지만 김 코치를 믿고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 부상당한 선수 출신 코치의 사랑

처음 코치 자리를 제의 받았을 때, 김 코치는 망설였다. 모굴, 바이애슬론 선수로 뛰었던 그는 2006년 모굴 경기를 하루 앞두고 훈련을 하다 무릎이 완전히 꺾인 채 점프대에서 떨어져 십자인대와 연골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다시는 모굴 스키를 탈 수 없게 됐다. 그렇게 김 코치는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지만 아이들과 같이 뛰지 못하는 코치가 되기는 싫었다. 스키를 못 타면 운동화라도 신고 아이들과 함께 뛰었다.

김 코치는 지난해 10월 아이들과 운동을 하다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져 온몸에 물집이 잡혔지만 꾹 참고 훈련에 나왔다. 주장 창현이가 “선생님, 숙소에 계시면 땡땡이 안 치고 저희가 알아서 운동 열심히 하고 오겠다”며 위로했을 때 김 씨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스키를 몰랐던 탄광팀 아이들은 이제 매년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겨울방학 합숙훈련 때면 오전 6시에 일어나 아침만 때우고는 장비를 들고 “빨리 운동하러 가자”며 코치를 기다릴 정도다. 스키와 방한복 등 장비 걱정 없이 운동을 하는 게 작은 소망인 주장 창현이는 크로스컨트리, 바이애슬론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태극마크를 달고 팬들의 환호 속에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는 게 그의 꿈이다.

평창=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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