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죽은 사람 체온이 27도?”
“얼굴에 생긴 상처는 왜?”
끈질긴 추궁에 범인도 두손
물증이 없는 상해치사사건을 수사해 유죄판결을 받아 낸 인천지검 공판송무부 손정현 검사. 인천=황금천 기자
“억울하게 숨진 60대 노인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었어요.”
국선 변호사로 일하다가 뒤늦게 검찰에 들어온 30대 여성검사가 물증을 남기지 않은 범인을 상대로 끈질긴 수사 끝에 자백을 받아내 화제가 되고 있다. 주인공은 2002년 사법고시(44회)에 합격한 뒤 법률구조공단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8월 경력검사 모집에 지원해 뽑힌 인천지검 공판송무부 손정현 검사(32).
첫 근무지로 인천지검 형사부에 배치된 손 검사는 올 8월 연수경찰서에서 송치된 상해치사사건을 배당받았다. 7월 27일 오전 9시경 인천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살던 인모 씨(61)가 외상을 입고 뇌출혈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었다. 구속된 피의자는 인 씨와 함께 살던 주모 씨(53)였지만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구른 인 씨를 집으로 옮겼을 뿐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목격자도 없고, 현장에는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았어요.” 사건 당일 행적 등으로 볼 때 주 씨가 범인이라고 판단했지만 물증이 없어 기소해도 무죄로 판결될 가능성이 높아 고민스러웠다고 한다.
“사건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될 단서가 나올 거라고 확신했지요.” 숨진 인 씨는 돌볼 가족이 없는 국민기초생활수급자였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주 씨가 집이 없어 함께 살아온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무죄 판결이 나면 인 씨의 억울함을 대신 호소해줄 가족이 없어 더욱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건기록을 보던 손 검사는 인 씨의 사망 시점에 주목했다. 아파트 폐쇄회로(CC)TV를 분석한 결과 주 씨는 25일 오후 9시경 인 씨의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 날 오후 7시경 이사한 사실을 발견했다. 주 씨는 집을 나올 때까지 인 씨가 살아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시신이 발견된 당일 오전 9시 인 씨의 직장(直腸) 온도는 27.1도로 실내온도와 같았다. 사람이 죽은 뒤 체온이 떨어지는 속도를 따져보면 인 씨가 숨진 지 약 17∼18시간 지나 발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 주 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숨진 인 씨의 얼굴에 난 상처도 왜 생긴 것인지 의문을 풀어야 했죠.” 주 씨는 인 씨의 상처가 계단에서 굴러 생긴 것이라고 진술했지만 손 검사는 믿지 않았다. 법의학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로 통하는 이정빈 서울대 교수를 직접 찾아갔다. 이 교수는 상처의 각도와 깊이, 형태 등을 세밀하게 분석해 ‘누군가 흉기로 찌르고, 주먹으로 때려 생긴 상처’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손 검사는 기소될 때까지 범행을 부인하던 주 씨의 공판에서 이런 증거들을 조목조목 들이대면서 주 씨를 압박해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자백을 받았고, 인천지법은 20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징역형을 선고했다. 손 검사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검사의 기본역할을 다한 것일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그는 “피의자들이 검사를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만 보고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아 신뢰를 주는 과정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손 검사가 여성이다 보니 수사과정에서 겪는 에피소드도 많다. 2월 상대방을 허위로 고소한 혐의(무고)로 조사를 받던 40대 남성을 따끔하게 혼낸 뒤 “잘못을 인정하면 벌금형을 받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남성은 순순히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돌아간 뒤 “인간적인 매력에 반했다”며 두 달에 한 번꼴로 ‘러브레터’를 보내온다고 했다. 그는 “국선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각종 사건에 연루된 서민들의 애환과 고충을 많이 들어 수사할 때 피의자와 피해자들이 얘기하는 억울한 사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며 “연수원 시절에 지병으로 별세한 아버지에게 검사가 되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 다행”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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