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플루가 바꿔놓은 학교… 감염예방 부적까지 등장

  • 입력 2009년 9월 22일 02시 51분


코멘트
교실마다 항균 스프레이
“수능 연기된다” 괴담
책 노트 빌려 달라 하지 않기!

서울 A 여고 3학년 손모 양은 등하굣길에 이용하던 버스를 9월 초부터 타지 않는다. 걸어가면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 하지만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중교통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한다. 7월 초부터 다니던 독서실도 가지 않는다. 주말에만 다니는 단과학원은 포기할 수 없어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는다.

“학교에서 신종 인플루엔자 감염자가 5명이나 나왔어요. 그 중 고3이 두 명이나 되고요.”(손 양)

개학 후 일주일 만에 학교는 3일간 문을 닫았다. 휴교 직후 손 양의 일상은 180도 달라졌다. 책가방을 쌀 때 손수건과 물통, 휴대용 손소독청결제를 꼭 챙긴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제일 먼저 교실을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다. 화장실은 손을 씻으려는 학생들로 늘 만원이다. 1분만 늦게 나와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속이 바짝바짝 탄다.

교실로 돌아와선 각 반에 비치된 항균 스프레이를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에 구석구석 뿌린다. 사물함 문도 그냥 열지 않는다. 손수건을 이용해 문을 여닫고 책걸상도 수시로 닦는다.

손 양은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고 했다. 경쟁심리 때문이 아니다. 혹시 모를 감염의 위험 때문이다. 예전처럼 친구와 손을 잡고 매점에 가거나 귓속말을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에도 말을 아낀다. 친구와 대화할 땐 가급적 멀리 떨어져 꼭 필요한 말만 한다. 집에서 싸온 물, 간식도 나눠먹지 않는다. 책이나 필기노트도 빌려주지 않는다.

각박해 보이지만 최근엔 간식이나 필기노트를 달라는 친구도, 주겠다는 친구도 없다는 게 손 양의 설명. 교실 안, 복도를 걸어 다닐 때도 다른 학생과 몸이 닿지 않도록 서로 조심한다. 다른 반 출입도 삼간다. 아예 ‘외부인 출입금지’란 종이를 교실 앞뒷문에 써 붙인 반도 있다. 학생들은 암묵적으로 형성된 이런 ‘룰’을 철저히 지킨다.

손 양은 “학교에서 신종 플루 확진환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학생들이 극도로 예민해졌다”면서 “수능을 50여 일 앞두고 감염되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라고 했다. 수험생 중엔 신종 플루 감염을 막아준다는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학생도 있다.

손 양은 “몸이 안 좋다며 점심시간 전 조퇴를 하는 학생,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도 적지 않다”면서 “학교 분위기가 흉흉해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신종 플루 감염자가 늘면서 학생, 학부모의 근심이 커지고 있다. 학교와 학원, 가정의 생활은 모두 변했다. 심지어 “가을이 되면 신종 플루가 대유행 국면에 접어들고 11월 12일 치러질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한 달 미뤄질 것”이라는 ‘수능괴담’도 고3 수험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초중고교에선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온을 잰다. 수업 도중이라도 체온이 37도 이상인 학생이 나오면 바로 귀가시킨다. ‘신종 플루로 인한 결석은 결석처리하지 않는다’는 가정통신문도 수시로 전달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방역작업을 벌이는 곳도 있다.

소풍이나 하루 일정으로 진행되는 체험학습을 취소한 학교도 많다. 1∼6학년이 모두 모여 치르던 운동회를 올해는 학년별로 나눠서 진행하는 초등학교도 있다. 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학부모회의 결과를 반영한 조치다.

이런 와중에 의도적인 조퇴·결석을 시도하는 학생도 나오기 시작했다. 경기 남양주시 한 고등학교의 교사는 “한창 예민한 고3 학생이 교무실로 찾아와 미열이나 복통을 호소하며 집에 가겠다고 하면 허락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심각한 증세가 발견되지 않아도 다른 학생들의 안전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조퇴를 허락하는 일이 있다”고 전했다.

학원도 비상상황을 맞긴 마찬가지. 온라인 강의로 수업을 대체하겠다며 결석을 알려오는 학부모의 전화가 눈에 띄게 늘었다. 여러 학생이 타는 학원버스도 위험하다면서 자가용을 몰고 자녀를 직접 학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엄마도 많아졌다.

이에 학원들도 신종 플루에 대한 갖가지 대비책을 시행하고 있다. 층마다 손 소독기를 설치하는 것은 기본.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엔 반드시 손을 씻도록 지도한다. 과학 개념수업처럼 강사의 설명 위주로 진행되는 수업시간엔 선생님은 물론 학생 전원이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하기도 한다. 학원생 중 확진환자가 나오자 일주일간 문을 닫은 학원이 있는가 하면, 해당 학생이 다닌 강의실을 아예 폐쇄해버린 곳도 있다.

학교, 학원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은 안심이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2학년 자녀를 둔 주부 최정희 씨(34·서울 강동구 둔촌동)는 “학교, 학원은 빠질 수 없어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도록 하지만 평소 함께 다니던 도서관이나 시장, 백화점엔 아들을 아예 데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주말에도 외출은 삼간다. 자녀가 “밖에 나가자”고 조르면 책을 읽어주거나 게임 형식의 온라인 학습 프로그램으로 공부를 하게 한다. 최 씨는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니 감염 위험 때문에 불안하고, 집에만 있자니 자녀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 고민”이라면서 “신종 플루의 ‘끝’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맞벌이 엄마 박모 씨(41·서울 강남구 대치동)는 최근 전화 한 통 때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2교시가 끝난 직후 딸아이로부터 “몸에 열이 난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박 씨는 “회사에서 전화를 받자마자 학교로 달려갔는데 알고 보니 단순히 친구들과 뛰어놀다 열이 오른 것이었다”고 말했다. 중고교생 자녀를 둔 엄마들은 자녀의 건강도 걱정이지만 뒤숭숭한 분위기 탓에 성적이 떨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다.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학교 또는 학원을 조퇴하거나 결석이라도 하면 학업에 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플루 때문에 학원엔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자녀를 보면 속이 터지지만 무조건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난국,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혜진 기자 leehj08@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