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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6월 16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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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백성들도 기생도
임금에게 거침없이 쓴소리
세계사에 유례없는 상소제도
익명의 글은 왜 태웠을까요
“이렇게 훌륭한 제도를 가진 조선이 어떻게 망할 수 있는가?” 어느 외국인 학자의 말이다. 이 훌륭한 제도란 상소(上疏)를 말한다. 상소 제도는 조선왕조 시대에 언로(言路)의 구실을 했다. 조정의 벼슬아치, 모든 백성들, 기생들까지 임금의 잘못 등을 적은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상소는 ‘옳은 소리’다. 조선 500년 동안 큰 자랑거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의 필자는 이런 사람들에게 상소 제도를 알려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도록 해준다. 다음 내용을 논술과 관련시켜 생각해보자.
(가) 첫째, 일족(一族)을 침해하여 백성들에게만 징집하는 폐단입니다. 일족을 못 살게 하는 폐단이 고칠 수 없는 고질이 되어 8도가 다 그 지경입니다. 한 사람이 도망치면 그 대역(代役)이 9족까지 미칩니다. 9족이 당하지 못하면 인보(隣保)에까지 미칩니다. 밭과 들에는 풀과 쑥대만 무성한데도 매기는 세금은 그대로 있습니다. 군적(軍籍)은 헛 명부로 되어 있으면서 방비하고 지키는 자는 그대로 있습니다. 한 집에서 장정 열 명의 세(稅)를 물어야 하고, 한 사람이 군사 열 명의 역(役)을 맡아야 하니 군사나 백성이 어찌 떠돌아다니지 않겠습니까? (상권 88쪽)
(나) 무릇 일의 공적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에서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정치하는 본체가 아닌가 합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든 것이라 한다면, 이것을 풍속을 변하게 하여 바꾸는 큰일이므로,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관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나라 사람이 옳다 해도 오히려 앞뒤를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의 도에 질정(質定)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백세라도 성인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는 연후라야 시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권 175쪽)
윗글은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가)는 선조 16년(1583) 황해도 순무어사(巡撫御使)인 김성일의 상소문이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군역(軍役)의 민폐와 백성의 고달픔 등을 낱낱이 아뢴다. (나)는 세종 26년(1445) 훈민정음에 반대한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의 상소문이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모든 국가의 중대사는 반드시 대신을 비롯하여 백관과 논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가)와 (나)를 바탕으로 스스로 논술 문제를 만들고 답안까지 작성해보자.
① ‘(가)를 통해 드러난 군역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아 밝히고, 상소 제도의 역할을 제시하시오’를 만들어보자.
(가)의 근본적 문제점은 백성에게만 병역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양반 계급은 몸으로 때우는 신역(身役) 이외에 군포까지 내지 않았다. 이 점은 군역의 큰 폐단으로 지적된다. 왕정에서 백성의 힘이 곧 국력이기에 민력(民力)을 길러야 하고 민심을 떠나서는 나라가 온전할 수 없다. 언로의 구실을 했던 상소는 왕이 여론에 따라 정치를 하게 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상소에 의해 어떤 문제가 제기되고, 찬반 의견이 수렴됐으며 이에 따라 조정 공론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② ‘(나)의 내용을 바탕으로 세종의 입장과 최만리의 입장을 각각 변론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시오’를 생각해보자.
세종은 당시의 분위기로 볼 때 훈민정음 창제를 서두를 수밖에 없다.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을 당시의 고루한 유학자들과 의논했더라면 의견이 백출하여 혼란만 가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라는 큰 일을 몇 명이 졸속하게 서두르다 보면 뒷날 그 병폐가 드러날 것을 염려했다. 국가의 중대사를 소수가 비밀리에 만드는 일은 경계의 대상이다. 훈민정음 창제가 백관들의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그들을 먼저 설득하고, 그 필요성을 강조해 국가의 총화 아래 이루어졌다면 한글의 보급은 더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이도희 송탄여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