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감염자 혈액 유통

  • 입력 2005년 9월 5일 0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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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바이러스(HIV) 감염자의 혈액을 원료로 한 의약품(주사제) 2만6000여병이 최근 시중에 유통, 판매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주고있다.

또 대한적십자사는 에이즈 감염 혈액이 수혈용으로 공급된 사실을 발견하고도 보호자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은 채 감독기관인 보건복지부에도 정식 보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가 보건복지부로 보낸 ‘수혈로 인한 HIV 감염사고시 임무수행 관련 보고’와 식품의약품안전청, 각 제약사의 관련 서류(사진)에 따르면 두 명의 에이즈 감염 환자의 혈액이 주사용 혈액제제의 원료에 각각 들어가 단백질 제제인 면역 글로블린 1만2021병, 영양 주사제로 주로 쓰이는 알부민 9358병, 혈액이 굳는 현상을 막아주는 항혈액응고제 2567병, 혈우병 치료제(혈액응고제) 2858병 등 총 2만6804병의 완제품으로 만들어져 시중에 유통됐다는 것.

이들 주사제 제조 과정에 들어간 에이즈 감염자 2명 중 한 명은 2004년 9월 광주의 한 헌혈의 집에서 헌혈한 강모(25·대학생) 씨. 강 씨의 혈액은 지난해 10월 대한적십자사 혈장분획센터에서 정상적인 다른 혈액들과 섞인 다음 반(半)제품 상태로 모 제약사에 전해진 후, 일련의 처리과정을 거쳐 알부민과 글로불린, 항혈액응고제, 혈우병 치료제 등으로 만들어져 사용됐다.

또 2004년 12월 인천의 한 헌혈의 집에서 헌혈한 김모(23·대학생) 씨의 혈액도 올 4월 역시 같은 제약사의 알부민 제조에 사용돼 3798병이 이미 유통됐다.

이 같은 사실은 올 5월과 4월, 강 씨와 김 씨가 헌혈한 혈액이 수혈연구원의 핵산증폭검사(NAT)에서 에이즈 양성 반응을 보이자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가 지난 1년 동안 이 두 사람이 헌혈한 경로를 추적 조사하면서 밝혀졌다.

하지만 적십자사는 올 7월 복지부에만 이 사실을 보고했을 뿐 대외적으로 공개하지는 않았다.

복지부는 에이즈 감염자의 혈액이 혈액제제의 원료로 사용됐다는 보고를 적십자사로부터 올 4월26일 받고도 해당 제약사들에겐 3일 후인 4월29일에야 통보하는 등 후속조치에도 문제를 드러냈다.

이에 해당 제약사는 보관중인 약품들까지 “지침 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5월 이후 모두 유통시켜 버렸다.

하지만 “약품 완제품 제조 공정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대한 최종 불활성화 공정을 거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지침 상 오염 혈액이 이미 제조공정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제조, 시판을 허용하고 있어 법 위반의 소지도 없다”는 것이 복지부와 적십자사측은 반응이다.

이에 대해 국회 보건복지위 고경화 의원(한나라당)은 “최근 혈우병 치료제를 먹고 에이즈에 감염됐다고 주장하는 혈우병 환자의 1심 승소 판결에서 보듯, 불활성화라는 게 절대적인 안전판이 될 수 없다”며 “에이즈 감염 혈액이 의약품의 재료로 들어갔다면 완제품으로 출시가 되었더라도 회수를 해야 마땅한데 제조공정이 시작됐다는 이유로 판매를 허용하는 것은 지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서울동부지법은 올 7월 “혈우병 치료제를 먹은 뒤 에이즈에 감염됐다”며 혈우병 환자들이 제약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혈액제제의 경우 다른 원인을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혈액제제와 에이즈 감염의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결했다.

한편 매년 에이즈 감염 혈액을 수혈용으로 사용해 비난을 받아 온 적십자사측은 올해는 아예 이런 사실을 환자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아 입 도마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교통사고를 당한 허모(26·경기도 부천시) 씨는 에이즈 감염자 김모(23·대학생) 씨로부터 수혈을 받았으나 다음날 바로 사망했다.

올 4월 김 씨가 에이즈 감염자임을 뒤늦게 밝혀낸 대한적십자사는 당연히 허 씨의 가족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적절한 보상절차를 밟아야 함에도 가족에게 알리기는커녕, 올 7월 복지부에 올린 보고서에 조차 이런 사실을 누락시켰다.

과연 시중에 유통된 혈액제제들은 안전한 것일까? 혈액제제로 인한 에이즈 감염에 대한 정부의 정확한 조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최영철 주간동아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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