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高大100년, 高大혁명

  • 입력 2005년 5월 2일 18시 28분


코멘트
5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 명문 사학 고려대엔 특별한 것들이 있다. 선후배 간의 끈끈한 유대 관계가 그중 하나다. 그만큼 잘 뭉친다. 한국 사회에서 이미 공인된 이 결속력이 유사시엔 불의(不義)와 독재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의 연대(連帶)로 나타나곤 했을 것이다.

해마다 기업체들을 상대로 한 대학 졸업생 평판도 조사에서 고려대 출신자들이 1위를 차지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유대감에서 오는 동료 선후배 간의 우의, 조직에 대한 충성심, 성실성 등이 고려대 출신자를 선호하게 만든다고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은 말한다.

고려대 입장에서 이런 유대감은 사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학교 자체가 역사의 격랑 속에서 교육구국(敎育救國)의 건학이념을 흔들림 없이 실천해 왔기 때문이다. ‘인재를 양성해 나라를 구한다’는 신념 아래 가르치고 기른 것이 남다른 사명감과 동지애를 북돋웠을 것이다.

▼유대감의 원천 ‘仁村정신’▼

오늘의 고려대를 있게 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이 평생 좌표로 삼은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의 정신도 이 학교 동문을 하나로 묶는 끈이 되고 있다. 사(私)보다 공(公)을 앞세우고, 믿음과 의리는 저버리지 않는다는 인촌의 정신이 상대적으로 강한 모교애와 일체감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생전에 인촌은 작업복 차림으로 손수 교정의 잡초를 뽑고 담배꽁초를 주웠다는데 학생들은 그가 인촌인지도 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고려대 출신자들의 유대감은 때론 질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돼 학교는 물론 사회 발전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대 동문들은 “이런 건학정신과 유대감이 없었다면 한국과 같은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사학이, 그것도 순수 민족사학이 100년이 넘도록 초지일관하며 뜻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고려대가 요즘 혁명 중이다. 이름과 전통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캠퍼스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모교를 찾는 동문들은 3년 전만 해도 흙먼지 날리던 서울 성북구 안암동 캠퍼스의 대운동장이 지상은 잔디밭과 분수대가 어우러진 유럽식 광장으로, 지하는 열람실과 각종 편의시설, 주차장이 들어선 다목적 공간으로 바뀐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시설도 시설이지만 ‘민족 고려대’가 그런 발상을 했다는 데서 더 충격을 받는 듯하다.

중앙광장 서편에 우뚝 선 100주년기념관이나, 공사가 진행 중인 종합체육관, 이공계 대학의 애기능광장 등도 캠퍼스의 지도를 바꾸고 있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의식의 변화다. 고려대 100년의 가치인 ‘민족’을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학교 관계자들은 “이제 ‘민족의 명문 사학’은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민족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학교든 기업이든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세계 고대 1000년’을 향한 대장정은 이미 시작됐다. 전체 강의의 25%가 영어로 이뤄지고 있으며, 49개국 395개 대학과 학생 교류 협정을 맺어 재학생의 20%에 달하는 1000여 명이 매년 유학을 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고려대로 유학 오는 외국인 학생도 급속히 늘어 올해에만 600명에 이른다. 고려대의 이런 변신은 국내외 많은 대학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고려대 개교 100주년이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含意)는 크다. 단순히 한 대학사(史)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인촌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된 보성전문을 인수한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 씨앗이 민족이라는 텃밭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마침내 세계로 뻗고 있다. 한국이 걸어 온 길,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민족에서 세계로” 대장정 돌입▼

고려대가 자랑하는 유대 관계는 그 외연을 조금만 넓히면 곧 한국의 민족주의에 닿고, 고려대가 뻗고자 하는 세계는 지금 우리가 넘고자 하는 세계화의 거센 파도에 다름 아니다. 국가든 기업이든 고려대가 걸어온 그 경로(經路)에서 보고 배울 게 있다고 본다. 과거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이를 미래의 경쟁력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 100년 된 기업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나라다. 고려대 개교 100주년을 축하한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