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공교육과 사교육]<1>미국

  • 입력 2002년 9월 2일 18시 32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 커시스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큐빅으로 입체도형을 만들어보며 부피의 개념을 배우고 있다. - 오스틴-박 용기자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 커시스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큐빅으로 입체도형을 만들어보며 부피의 개념을 배우고 있다. - 오스틴-박 용기자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 커시스초등학교 5학년 수학시간. 교사는 난데 없이 ‘큐빅’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왔다.

“책상 위에 놓인 큐빅을 가지고 칠판에 그려진 육면체를 만들어 보세요. 다 만든 학생은 큐빅의 모양을 바꿔서 옆 친구와 비교하세요.”

교사는 칠판에 다양한 크기의 육면체를 그리고 부피의 개념을 설명한 뒤 20여명의 학생들에게 큐빅을 나눠줬다. 한국 학생들이면 누구나 달달 외우고 있는 ‘부피〓가로×세로×높이’라는 공식은 수업시간 내내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친구와 큐빅 모양을 비교해 보세요.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크기의 큐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피는 모두 같아요.”

교사는 교실 이곳 저곳을 돌며 기초부터 응용문제까지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수업 내용을 설명했다. 사립대의 특례입학 제의까지 받은 수학 천재 애덤(11)과 아직도 사칙연산이 힘든 매기(11·여)까지 다양한 학생들이 한 반에 섞여 있다.

교사 리브렛 제이넬(28·여)은 “학생 수준에 따라 영재 교재인 ‘멘사’교재부터 초등학교 2, 3학년용 책까지 다양한 교재를 사용한다”며 “유학 온 한국 학생들은 공식을 이용해 수학 문제를 곧잘 풀지만 기본 원리를 잘 모른다”고 지적했다.

공식이나 요점만 달달 외우는 암기식 교육은 미국 학교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교사마다 사용하는 교재도 다르고 시험방식도 제각각이어서 한국계 학원의 ‘찍어주기’식 학교성적 관리는 사실상 어렵다. 학원의 요점 정리나 선행학습을 하는 학생이 드문 것도 이 때문이다.

▽사교육이 필요없는 공교육〓미국의 학교는 우열반을 나누거나 같은 반이더라도 실력에 따라 수준별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학원 과외를 하는 학생들은 많지 않다. 커시스초등학교의 경우 ‘개인별 교육계획’에 따라 학습부진아나 자폐증 학생들은 학습실, 영재성이 있는 학생들은 ‘영재반(Gifted & Talented)’에서 수준별 수업을 받는다.

교과 수업도 학생들의 실력에 따라 천차만별. 초등학생의 읽기 교재는 17단계로 나뉘어져 학생들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교재로 공부할 수 있다. 성적이 좋으면 월반도 가능하고, 성적이 나쁘면 낙제를 하기도 한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서를 첨부하면 낙제를 면할 정도로 학교가 공부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는다.

또 학교별, 교사별로 수업 내용이나 교과서가 달라 선행학습을 하기도 힘들다. 고교의 경우 한 한기에 팀별로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과제가 3∼5개나 되고 봉사활동, 스포츠, 교내 활동 등을 하려면 방과후 학원에 다니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방과후 과외〓미국이라고 사교육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습지, 개인과외, 컴퓨터과외,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 입시학원 등 다양하다. 개인과외는 시간당 50∼100달러로 비싸 상류층 학생이 주로 받는다. 과목별 과외를 받더라도 뒤떨어진 학업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더 잘하기 위해 선행학습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교에 진학하면 SAT를 준비하기 위해 사설 학원에서 1∼3개월 동안 SAT 특강을 받기도 한다. 미국 고교의 학과 시험이 논문이나 발표 형식이기 때문에 낯선 객관식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SAT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미국 뉴저지주 노던밸리고교는 아예 한 사설학원의 SAT 특강을 교내에 개설하고 방과후 프로그램으로 운영하고 있다. 학원은 학교 교실을 이용하는 대신 900달러인 수강료를 800달러로 할인해 준다.

이 학교 진학부장 패트리샤 로퍼스(52·여)는 “객관식인 SAT에 익숙해지도록 하고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도 줄일 수 있어 교내에 개설했다”며 “강의마다 30∼50여명의 학생들이 수강할 정도로 인기”라고 말했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 사이에서는 주 1회 방문지도를 받고 월 35달러를 내는 한국, 일본계 방문지도 학습지가 인기다. 최근에는 학생 스스로 강의실에서 컴퓨터로 공부하는 온라인 학습도 등장했다. 상담교사가 강의실을 돌며 지도하기 때문에 주 1시간 강의에 100달러의 수강료를 받는다.

▽공부보다 예체능 과외〓미국에서 공부만 잘하는 학생은 ‘얼간이(Nerd)’로 불린다. 대입 전형에서도 학교 성적만 우수해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방과후에 수영, 테니스, 피아노 등 예체능 과외를 받는 학생들이 많다.

경시대회 등 비교과 성적에 반영되는 수상경력을 채우기 위해 학원 선행학습을 하는 학생도 드물다. 대학교나 과학자단체 등이 주최하는 수학경시대회 등이 5개 정도 있지만 교내 수학 동아리 학생 정도나 관심을 갖는다.

선행학습을 하더라도 다음 학기나 학년에서 배울 기초 원리를 익히는 예습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고작이다.

9월에 초등 6학년이 된 키린 리시(11·여·텍사스주 오스틴시)는 “여름방학 때 6학년에서 배울 내용을 미리 공부했다”며 “기초적인 내용을 만화로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라고 말했다.

오스틴·뉴저지〓박 용기자 parky@donga.com

▼커시스초등 교장 "美 전인교육 성적 강조로 위기맞아"▼

“10년 전보다 학력 경쟁이 훨씬 치열해졌어요. 이대로 가면 미국도 한국처럼 엄청난 사교육 문제가 생길 겁니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시 커시스초등학교 배리 에이드맨(48·사진) 교장은 학업성취도를 강조하는 미국 교육개혁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시험성적 위주의 학력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져 학생들이 심각한 공부 스트레스를 겪는다는 것이다.

텍사스주는 매년 모든 초중고를 대상으로 읽기와 수학 과목시험(TAAS)을 실시해 결과를 낱낱이 공개하고 학교도 이를 학부모에게 통보해야 한다.

학부모들은 시험 결과에 따라 학교를 평가하고 좋은 학교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

에이드맨 교장은 “교육당국이 수학 읽기 등의 시험 성적을 강조해 미국 학교의 전인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매년 전교생의 15%인 100여명의 학생들이 다른 학군에서 전학온다”며 “명문대 진학을 위해 사립 중고를 목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커시스초등학교는 백인과 아시아계 중상류층 학생이 90%를 차지한다. 해마다 주내 초등학교 가운데 최고 성적을 거두는 공립 명문이다.

“가끔 개인과외 교사가 학생 지도를 위해 학교 방문을 신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폐증 등 장애가 있는 학생을 제외하고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일부 중상류층 자녀들이 개인과외를 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며 “개인과외나 학습지 과외를 해도 학교 진도를 미리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학교수업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학과 읽기 성적만으로 아이들을 평가할 수 없다”며 “학교는 학생들이 음악 체육 과학 등을 골고루 배우고 소질을 계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에이드맨 교장은 우열반 편성에 반대한다. 학력으로만 학생을 평가하는 것보다 다양한 소질과 특기가 있는 학생들이 섞여 공부하는 것이 전인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당신의 자녀가 14살에 대학에 가면 행복하겠습니까. 공부가 학교의 전부는 아닙니다.아이의 잠재능력을 계발하고 사회성을 키우려면 다양한 학생들이 어울려 배우는 학교교육이 필수적이지요.”

에이드맨 교장이 우열반 편성을 요구하는 학부모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오스틴〓박 용기자 parky@donga.com

▼"선행학습 필수" 한인사회 사교육 열풍▼

미국 뉴저지주 한인 타운에는 초중고생 대상 한국계보습학원이 150개나 된다. - 뉴저지=박 용기자

과외가 별로 없는 미국에서도 한인 사회의 사교육 열풍은 유별나다. 2, 3년 체류하는 한국 상사 주재원들이 늘어나면서 한국식 ‘선행학습 학원’이 늘고 있다.

교포가 많은 로스앤젤레스, 뉴저지주 등의 한인 타운에 학원들이 밀집돼 있다. 뉴저지주만 해도 대입 학원 30∼40개, 초중고 보습학원 150여개가 몰려 있다. 이 지역에는 한국계 학습지회사도 5개사가 진출해 있다.

학원들은 대부분 미국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반, 사립고와 과학고 진학반 등을 개설하고 있다. 학원별로 방과후 개인지도를 병행하거나 학교 숙제를 도와주는 ‘숙제반’도 운영한다. 수강료는 시간당 10∼20달러 수준.

미국에서도 최근 과학고 등 특목고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선행학습을 하거나 방학특강도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 명문대 진학을 위한 학부모 세미나와 한국인 학생 대상의 경시대회도 열린다.

뉴저지 지역에서는 한국 유학생과 교포 학생을 대상으로 승마를 배우면서 SAT 특강을 받는 3200달러짜리 방학캠프가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교 11학년 이모양(17)은 “10학년 때 배우는 대수Ⅱ를 9학년 때 학원서 배웠다”며 “미리 배워서 학교 공부가 재미 없다”고 말했다.

대도시 한인 타운에서 시작된 사교육 열풍은 다른 지역의 한인 사회로 퍼져 나가고 있다. 컴퓨터회사 델(Dell)사가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시도 최근 한국상사 주재원이 늘어나면서 한국계 선행학습 학원이 늘고 있다.

교포 조영란씨(34)는 “주재원 거주 지역에 한국계 선행학습 학원 2곳이 생겼지만 미국 학생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뉴저지주 팰리세이즈 파크지역 교육위원이면서 20여년간 보습학원을 운영 중인 제이슨 김씨(45)는 얼마 전 한국에서 학습지 업체가 주최한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했다가 깜짝 놀랐다.

초등학생을 위한 경시대회였지만 문제가 대부분 중학생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한국 초등학생들은 어려운 공식을 이용해 문제를 척척 푸는 것이었다. 개념 이해를 중시하는 미국식 교육에 익숙했던 교포 학생 20여명은 대부분 꼴찌 수준이었다.

김씨는 “선행학습을 한 학생은 공식을 잊거나 낯선 문제를 만나면 쩔쩔 맨다”며 “미국 교육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식 선행학습 과외를 요구하는 학부모들이 의외로 많다”고 말했다.

뉴저지〓박 용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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