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확인, 강제징용희생자 유골 부산 대각사 안치후 유실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8시 27분


“…일본 정부는 유골을 능금상자 69개에 넣어 새끼로 포장하여 보내왔으며 조선인 직원에게 ‘좋은 선물이 아니냐’고 조롱하며 마치 잡화상자처럼 던지고 발길로 차는 등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왜인의 악행은 격분을 자아냈다.”(부산신문 48년 2월7일자)

48년 2월4일 부산항. 태평양전쟁에 군인 또는 노무자로 억울하게 끌려갔던 한국인들은 이렇듯 죽어서도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이 유골은 유가족에게 전달되기는커녕 반세기 이상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부산의 한 사찰에 안치됐다 관리소홀에 따라 유실된 것으로 본보 취재진이 확인했다.

고국에 와서도 고향을 찾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이들 희생자 유골의 추적과정과 확인된 사실, 남는 문제 등을 살펴본다.

▽유골은 대각사로〓48년2월 제1차로 부산항에 도착한 징용희생자의 유골, 유품 및 위패는 모두 4597명분. 당시 부산신문은 “유골 569주가 신창동(新昌洞) 불교교원에 안치됐다”고 기록했다.

국제시장 번화가의 이 사찰은 과거 일본사찰이었으나 해방 후 불교경남교무원이 되었고 현재 대각사(大覺寺)로 불린다.

취재팀은 수소문 끝에 45∼54년 이곳의 교무원장을 지낸 조용명(曺龍溟·96)스님을 찾는 데 성공했다. 아직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용명스님은 “48년 정부기관이 일본에서 돌아온 징용자 영령이라며 트럭 두 대분의 유골을 싣고 와 위령제를 지낸 뒤 법당 지하에 안치했다”고 당시 상황을 또렷이 떠올렸다.

48년 2월 부산항으로 돌아온
태평양전쟁 전사자 유해 등

지역유골유품위패
경기 40 8 236
충북 2 0 368
충남11724 330
경북104 4 709
경남 68 1 490
전북 53 0 914
전남122 3 839
강원 32 0 85
황해 1 0 15
595403986

그는 또 “내가 이 절을 떠날 때까지 유골은 고스란히 법당 지하에 있었으며 이를 찾으러 온 정부 관계자나 유가족은 한 명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58년부터 이 절을 관리해 온 김용오(金容午)주지스님 등은 “일제시대부터 이 절에 한국인 일본인 등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골이 많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직접 본 것은 아니다”며 말을 잘랐다.

▽또다시 잿더미로?〓대각사는 54년 이후 수년간 비구―대처 분쟁에 휘말렸고 그 와중에 59년 4월23일 큰 화재가 났다.

당시 동아일보는 “대각사 화재로 대법당 등 건물 3채가 전소됐고 법당에 안치된 일반 및 ‘전몰장병’ 유골 26주도 소실됐다”고 보도됐다. 사찰 관계자들은 “대각사에 6·25전사자 유골은 들어온 적이 없다”고 말해 이때 소실된 유골이 징용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치됐던 569주’와 ‘화재로 소실된 26주’ 사이에는 차가 너무 커 사찰분쟁 등의 과정에서 다른 이유로 유실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가 나서야”〓최근 한국정부를 상대로 ‘유골인도 소송’을 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측은 유골이 대각사에 안치된 뒤 유실됐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올해 일본 후생성에서 ‘아버지 유골이 48년2월 반환됐다’고 통보받은 조영순(趙英順·57)씨는 “유골이 국내에 있다면 언젠가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면서 “지금껏 재혼도 않고 아버지 흔적을 찾으려 애쓴 어머니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오열했다.

유족회의 김은식(金銀植)사무국장도 “유골을 건네받아 보관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은 사실에 분노한다”며 “다만 48년6월 돌아온 제2차분 3000여명의 유골은 행방이 아직 미궁 속에 있으니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 나서서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