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제5년 진단]불투명한 예산 집행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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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세금으로 충당되는 지자체 예산이 새어나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같은 비리가 드러나도 해당 지자체가 ‘혈세(血稅)’를 되찾을 의지가 없을 경우 환수가 불가능한 것이 우리 현실이다. 시민단체 등은 주민들이 직접 예산 환수를 추진할 수 있도록 법적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환수 안되는 혈세▼

경기 부천시의회는 올해 1월 부천시에 대해 청소 대행업체인 원미환경으로부터 24억3000여만원을 회수하고 이 업체를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라고 요구했다.

부천시의회는 당시 6개월간에 걸친 특별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원미환경이 부천시와 청소 도급계약을 했던 93∼98년 직원 수를 허위로 늘리고 이들의 퇴직일자를 조작해 시로부터 과다한 인건비와 퇴직금을 받아간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부천시는 시의회의 환수 요구가 있은지 6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내부적으로 ‘환수 불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부천시 청소사업소장 정광렬(鄭光烈)씨는 “검찰에서 이미 지난해 수사 종결한 사안이고 원미환경의 당시 업주가 사망해 형사고발할 대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부천시는 원미환경측이 시에 제출했던 직원 수 등은 참고 자료로만 취급했을 뿐 그 자료를 근거로 인건비 등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 법률검토를 한 참여연대 납세자운동본부 하승수(河昇秀)변호사는 “부천시가 직원 수 등의 자료를 토대로 도급 수수료를 산정한 사실이 시의회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에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법적으로 원미환경의 책임을 묻게 될 경우 관련 공무원들에게 ‘불똥’이 튈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부천시의 입장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혈세 낭비 실태▼

경실련은 경기 군포시가 98년 17개 업체와 청소사업을 수의계약하면서 비용지급 기준을 쓰레기 발생량에서 가구수로 변경하는 방식을 사용, 이들 업체에 8억3000여만원을 더 지불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군포 경실련 공동대표 곽도(郭燾)씨는 “대다수 지자체가 비용지급 기준을 가구수에서 쓰레기 발생량으로 바꾸고 있는데 유독 군포시는 이를 역행해 예산을 낭비했다”고 말했다.

지자체가 청소대행업체나 주차장 공원 등을 위탁 관리할 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공무원과 일부 토호세력이 결탁하는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시민단체들의 ‘진단’.

서울 노원구의회 ‘계약제도개선을 위한 특별위원회’는 노원구가 현행법상 시급한 공사가 아니면 공개입찰을 해야 하는 공사비 1억원 이상의 수해복구 공사를 98∼99년 여러 건(총 공사비 33억원) 수의계약한 것으로 드러나 예산을 낭비한 의혹이 짙다고 최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원구측은 “공사의 시급 여부는 판단의 문제”라며 “하루라도 빨리 수해복구 공사를 하려다 보니 수의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특위가 최근 노원구와 각종 계약을 했거나 계약을 희망하는 업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지자체가 수의계약시 업체선정을 공정하게 하는가’란 질문에 응답업체(54개)의 51.8%(28개 업체)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답했다.

▼대안▼

경기 과천시 원문동 권태원(權泰源·43)씨는 지난해 8월 과천시장을 상대로 ‘과천시장과 시의원 등 17명이 불필요한 해외출장을 가면서 경비를 시비로 충당해 시 재산 1100만원을 낭비했다’며 시 재산 손실 원상복구 청구소송을 수원지법에 냈다.

하지만 권씨는 지난해 11월 소송이 각하되는 바람에 예산환수 여부에 대한 판단도 받아보지 못했다. 이유는 납세자 소송제도가 우리나라에선 허용되지 않기 때문.

납세자 소송제도란 주민(납세자)이 직접 지자체나 정부를 상대로 낭비된 예산을 환수하거나 예산낭비를 예방하겠다는 내용의 소송을 내는 것.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미국과 일본처럼 이 제도가 도입돼야 예산낭비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 도쿄고등재판소는 올해 4월 시민들이 지방의회 의원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납세자 소송)에서 ‘전국 지방의회 친선 야구대회에 참석해 각종 경비를 지자체 예산으로 지출한 지방의원 등은 경비를 지자체에 반환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명건기자>gun43@donga.com

▼부산 시민단체 "혈세 도둑질 용납못해"▼

부산경실련 등 부산지역 13개 시민단체는 5월 부산 황령산 산사태 복구공사와 관련된 공무원 비리사건이 드러나자 전국에서 처음으로 자치단체를 상대로 잘못 사용된 예산 환수 운동에 나섰다.

이에 앞서 부산경찰청은 4월 28일 황령산 산사태 복구과정에서 공사비 19억9000여만원 중10억여원을 빼돌린 4개 업체 관계자 9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이들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공무원 1명을 구속하는 한편 다른 공무원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예산환수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부산경실련 이동환(李東晥)사무처장은 “공무원들이 예산을 ‘주인 없는 돈’으로 여겨 아무렇게나 사용하는데 대한 책임을 묻고 납세자의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이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부산경실련은 부산시에 소속 공무원의 비리로 새나간 예산을 환수하라고 요구하고 불응할 경우 시민 1000명의 이름으로 행정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또 이 소송의 원고인단 구성을 위해 황령산터널을 이용하는 시민 500명의 서명도 이미 받았다.

이와 함께 변호사 회계사 교수 시민단체 대표 등으로 구성된 시민조사단을 가동해 부산시의 복구공사비 사용내용에 대해 정밀조사를 벌이는 한편 납세자소송제도의 입법화를 위한 청원을 준비중이다.

<부산〓조용휘기자>sile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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