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칼라 '우울한 초상'… 주식·벤처·거품사회에 맥빠져

  • 입력 2000년 4월 24일 19시 04분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패배감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자꾸 이 사회에서 우리만 낙오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입니다.”

21일 인천 남동구 남동공단의 한 화학공장에서 기자와 만난 작업복 차림의 노동자 박모씨(46)는 고개를 떨구며 ‘푸우’ 한숨을 내쉬었다. 주식투자로 2000만원을 날렸다는 박씨. 그가 절망하는 이유는 단지 돈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벤처와 주식’이라는 신조류에 편승하지 못한 40, 50대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들이 느끼게 된 ‘박탈감과 소외감’이었다. 이들에게서 20세기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산업 역군’의 자존심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상대적 박탈 소외감 깊어

월수입 180만원의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한사코 ‘노가다’라고 부르는 박씨는 “나는 대학도 못 다녔고 벤처가 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노가다가 사업을 하겠느냐. 그렇다고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겠느냐. 왠지 나만 크게 손해보는 느낌”이라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매스컴마다 벤처기업가와 주식 부자의 성공스토리가 요란하게 소개되지만 노동자에겐 별천지의 이야기이고 이들이 화제가 될수록 상대적 박탈감만 깊어간다는 것이 박씨의 고백이다. 블루칼라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는 것이 주식이지만 원금을 건지기는커녕 반년이 채 안되어 ‘반토막’이 나기 일쑤다.

대형 자동차회사의 한 하청회사에서 15년 동안 일했다는 조모씨(43). 월수입 150만원으로 나름대로 안정된 가정을 꾸려 가던 조씨는 지난해 말 “아들 보기가 부끄럽다”는 이유로 주식에 손을 댔다. 조씨는 “수억, 수십억원씩 버는 벤처기업가 이야기가 나오면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한평생 자동차만 만진 내가 벤처를 할 수도 없고…. 결국 우리 같은 노동자에게 단 하나 남은 기회는 주식뿐이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내집 마련’을 위해 모은 3000만원도 거의 날렸다.

조씨는 생산직 노동자가 느끼는 최근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뼈빠지게 일해 자동차를 만들죠.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자동차를 판매한다는 벤처기업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번답니다. 망치 들고 뚝딱거려야 뭐가 되는 줄 알았던 우리에게 지금 사회는 너무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식투자 '반토막' 좌절

조씨는 “회사 동료 대부분이 ‘살 맛 안 난다’는 푸념과 절망감에 빠져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이 나고 사기가 오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같은 침울한 분위기는 대기업 공장도 마찬가지.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 2만7000여명중 무려 2만4000여명이 우리사주에 투자했지만 큰 손해를 입었다. 이 회사 노조의 이승용(李承勇)고용대책부차장은 “‘출근 때 동료 표정만 보면 어제 주가를 알 수 있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노동자 대부분이 종일 휴대전화를 이용해 주가에만 관심을 쏟는다. 내놓고 말은 안 해도 대부분이 주식과 벤처로 성공한 사람들을 동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차장은 “과거에는 축구장 7개 크기의 큰 배를 만들고 나면 ‘내가 만든 저 배가 세계를 누비겠지’라는 뿌듯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처지고 있다’는 낙오감만이 팽배해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생산직 노동자들의 이 같은 정신적 침체가 한국사회에 만연한 ‘거품’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고려대 경영학과 장세진(張世進)교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기여한 것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은 사람이 양산되는 바람에 노동자가 심리적 절망을 느끼고 있다”며 “거품이 빠지더라도 상당기간의 후유증이 걱정된다”고 지적했다.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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