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시장' 사람이 없다…일당 짭짤 선거판으로 몰려

  • 입력 2000년 3월 20일 19시 32분


20일 오전 4시. 경기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건설인력시장. 차가운 새벽공기 속에 150여명의 노동자들이 모닥불을 쬐며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곳은 많을 때는 10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들던 수도권 최대의 인력시장. 하지만 총선 분위기가 가열되면서 수가 크게 줄어 예전처럼 많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선거운동 나도 좀 소개를"▼

기자가 여성 4, 5명이 모인 곳으로 다가가 “돈 받고 선거에 동원되는 경우가 있느냐”고 묻자 이모씨(63)는 대뜸 “당신 선거브로커냐. 요즘 선거특수가 일고 있는데 일자리가 있으면 나도 좀 소개해달라”고 바짝 달라붙었다. 이씨는 “공장 등에서 잡일하는 것보다 선거운동이 몸도 편하고 일당도 더 많다”며 “여기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선거특수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1일 인력시장’이 요동하고 있다. 성남시뿐만 아니라 서울역 주변 등의 인력시장과 각종 직업소개소의 일용노동자들이 줄줄이 선거판으로 옮겨가는 ‘인력 대이동’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4년 전 총선 때만 해도 하루 12만원 벌이가 가능했던 일용노동자들은 당시 일당 5만원선의 선거판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일자리가 충분치 않은 요즘은 일당 6만원짜리 ‘선거일자리’가 최고 인기다. 파출부로 나서는 인력도 최근 30% 이상 줄었고 농촌도 일손부족으로 품삯이 크게 오르는 등 ‘선거특수현상’이 한창이다.

20일 오전5시 서울역 앞에서 만난 현모씨(36)는 “선거판으로 사람이 많이 빠져나가 썰렁하다”고 말했다. 현씨는 “요즘 일 나가봐야 6만원 벌기도 수월찮고 선거는 일이 편하니 다들 나가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지방원정'도 적지않아▼

서울역 인력시장도 최근 들어 30% 정도 사람이 줄었다. 지방으로 내려가 선거판에 동원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게 그의 귀띔.

97년 겨울부터 노숙생활을 시작한 박모씨(65)는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대거 선거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98, 99년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 동원 경험이 있는 박씨는 “돈도 받고 밥도 얻어먹는 ‘유세장 일거리’는 노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일자리”라며 “노숙자들끼리는 선거브로커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다 있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급증했던 ‘파출부’ 수가 급감한 것도 선거열기와 무관치 않다.

영등포구의 한 직업소개소 소장은 “파출부 지원자가 최근 30% 이상 줄었다. 선거관련 행사요원 등으로 참가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YWCA 명동본부의 파출부 알선사업 담당간사 송미령(宋美令)씨는 “선거 행사에 참여하려고 회원 활동을 중단한 주부들도 꽤 된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영농철에 접어든 농촌에서는 젊은 층이 대거 선거운동원이나 행사요원으로 동원되는 바람에 일꾼 품삯이 남자 4만5000원, 여자 3만원선으로 30% 이상 급등했다.

총선시민연대의 이태호(李泰鎬)정책기획국장은 “일용직 인력시장이 선거로 흔들린다는 것은 정치권이 음성적인 돈선거를 벌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했다.

<이완배·차지완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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