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 공무원 신규 임용자들 수년째 발령 못받아

  • 입력 2000년 1월 9일 19시 54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도 발령을 못받아 벌써 2년반째 실업자로 지내고 있습니다. '청렴한 공복이 돼 사회에 봉사하겠다'던 합격 당시의 포부마저 흐릿해지는 것 같아요."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길게는 수년째 발령을 못받아 고통받고 있는 '예비공무원'들이 많다.

이들은 예비공무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드러내 놓고 하소연이나 불평도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다. 9일 본보 취재팀이 전국 시 도의 공무원 임용 현황을 조사한 결과 부산시 울산시 경기도 충남도 등 대부분의 광역자치단체가 직원을 신규 채용해 놓고도 길게는 3년, 짧게는 수개월 동안 미발령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시의 경우 현재 36명이 발령을 답지 못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97년 11월 선발된 행정7급 5명중 4명, 98년에 선발된 27명 중 11명이 포함돼 있다. 충남도는 미발령자가 모두 117명이나 된다.

부산시의 경우 96년에 채용한 1명, 97년에 채용한 191명 등 모두 192명이 미발령 상태. 시 관계자는 "일반직 116명은 올해 모두 발령이 날 것으로 보이지만 기능직 76명은 아직도 분야별로 인력이 남는 상태여서 언제 임용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경북도의 경우 97년과 98년 공채시험 합격자 가운데 112명이 아직 발령을 받지 못하고 있고 경기도에선 108명이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시는 97년말 채용한 230명을 2년이 지난 뒤인 지난해 12월 한꺼번에 임용했다.

그러나 서울시에는 지난해 9월 선발한 354명 중 298명이 현재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 장기 미발령자들은 대부분 실직자처럼 지낸다. 처음에는 학원에도 다니며 나름대로 공무원 생활을 준비하던 사람들도 미발령 기간이 길어지면서 의욕을 잃고 놀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대전에 사는 박모씨(60)는 "아들이 2년이 넘게 발령을 못받다보니 다른 데 취직도 못하고 혼담도 깨져버렸다"며 "아들은 발령을 받고 난 뒤 불이익을 받을까봐 그동안 어디에 하소연도 못했다"고 말했다.

충남도 공무원 발령을 기다리고 있는 한 합격자는 PC통신에 익명으로 올린 글에서 "어렵게 공부해 합격했는데 벌써 3년째 주변에서 '백수'소리를 듣고 있다"며 "국가기관이 이렇게 무계획적으로 사람을 관리해도 되느냐"고 항의했다.

각 시도는 "대량 미발령 사태는 IMF사태로 각 기관이 구조조정을 하면서 정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각 자치단체 내부의 인력 상황을 들여다 보면 무원칙하고 무계획적인 인력운용이 더 큰 원인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전국의 자치단체들은 41년 이전 출생자를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놓고 있다. 충남도의 경우 대상자가 50명 가량 되는데 이들은 연말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보수를 받으며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게 된다.

결국 명예퇴직 대상자들이 정원을 채우고 있는 동안 한창 일할 젊은 신규 채용자들은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중단기 계획을 세우지 않은채 무작정 인원만 늘리려는 관행도 장기 미발령 사태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경기 A시의 경우 98년 말 18명을 채용했으나 결원이 생기지 않아 보직을 주지 못했다.

<지방자치부>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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