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온北 새로본南/귀순자 체험기]「남조선病」 망년회

  • 입력 1997년 1월 5일 20시 05분


「망년회」라는 폭음의 긴 터널에서 허우적거리다 새해를 맞았다. 새해 먼동을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본 셈이다. 이 아침, 『새해에는 뭘 잘 해보겠다』는 거창한 계획보다 술에 절어 산 자신에 대한 반성이 먼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에서는 이러지 않았다. 귀순자들 중에는 남한의 연말풍경을 「남조선병(病)」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망년회는 그 병의 절정으로 보인다. 북한의 연말은 조용하다. 12월 한달간 술을 입에 대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물론 북한에도 망년회 비슷한 모임이 있다. 술집이 없어 대개의 망년모임은 가정집에서 있게 마련인데 드물기는 하지만 한번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는 이들도 있다. 먹을 것도 부족한 판에 술이 얼마나 있겠는가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살이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옥수수 등을 이용한 밀주가 꽤 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별개인 듯하다. 북한에서 망년모임 뒤끝에 일어나는 진풍경의 하나는 신발 챙기기다. 좀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취해서인지 고의인지 남의 신발을 신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새 신을 놔두고 헌 신을 신고 돌아오기라도 하면 부인네들의 꾸중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된다. 신발을 검사받고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한다. 어떤 부인들은 술자리에 가는 남편에게 새 신발은 집에 두고 제일 남루한 신발을 신고 가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연말 풍경은 어쩌다 있는 것이지 「북조선병」이라 불릴 정도와는 거리가 멀다. 남한에서 대학을 다시 다니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남한은 「술과의 전쟁」을 치르는 사회라는 느낌이 든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해 12월 한달동안 마신 술만 해도 북한에서 20여년간 마셨던 양보다 훨씬 많았다. 주변을 봐도 12월이 되면 약까지 먹어가며 술에 아예 젖어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주화가 진전돼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은 술자리 분위기다. 군의 상명하복 체계가 그대로 통용된다. 상사나 선배가 돌리는 폭탄주 회오리주를 「쫄따구」가 어찌 감히 거절할 것인가. 싫은 기색을 내비칠 양이면 내무생활의 고달픔을 감수해야 한다. 신세대의 등장으로 술자리 군사문화가 도전을 받고 있다지만 아직은 여전히 간 큰 선배, 간 큰 상사, 간 큰 남편들이 분위기를 지배하는 듯하다. 또 새해를 맞았다. 북녘의 어려운 오늘을 생각하면 사무치는 그리움의 저편으로 서러움이 복받친다. 張 永 鐵 △30세 △동독 프라이베르크대학 유학중 89년 귀순 △서강대 신방과 졸업 △포항제철 구매본부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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