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참을 수 없이 가벼운 克日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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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오피니언팀장
이진 오피니언팀장
만약에 할아버지 때 원수 간이었던 집안의 손자를 다시 원수로 만난다면? 영화 또는 드라마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런 스토리가 사실인 양 퍼지고 있다. 그것도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한창 재생산되는 중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할아버지가 아베 노부유키라는 것이다. 아베 노부유키가 누구인가. 일본 육군 대장 출신으로 총리를 지낸 뒤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왔던 인물이다. 1944년 7월에 제9대 총독이 됐으니 태평양전쟁 말기다. 그때 식민지의 우리 조상들을 얼마나 쥐어짰을까. 지금까지도 후손의 감정이 누그러졌을 리 없다. 그는 전범으로 체포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하지만 아베 노부유키는 아베 총리의 할아버지가 아니다. 아베 노부유키의 한자는 ‘阿部信行’이고 아베 총리는 ‘安倍晋三’이다. 즉 성(姓)의 발음이 아베(あべ)로 같을 뿐 한자는 ‘阿部’와 ‘安倍’로 완전히 다르다. 한일관계사를 전공했고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낸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고 (조부와 손자 사이라는 말은) 완전 거짓말”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전혀’에 아주 힘을 주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베 총리의 조부는 중의원 의원을 지낸 아베 간, 부친은 외상이었던 아베 신타로다.

감정이 이성을 누른 탓일까. 아베 총리와 아베 노부유키가 한집안이라는 허위사실은 누리꾼들만 퍼뜨리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전공한 교수마저 한 경제신문 칼럼에 두 사람이 조손(祖孫) 간이라고 버젓이 써놓았다. 이달 초 한 시인은 지방지 칼럼에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는 바로 아베 총독의 손자’라고 적었다. 내로라하는 어느 보수단체는 ‘그대(아베 총리)는 우리에게 두 번 사과해야 한다. 한 번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만행에 대해, 또 한 번은 A급 전범에 해당하는 그대 할아버지들의 악행에 대해’라고 꾸짖었다. A급 전범 용의자였고 총리까지 지낸 기시 노부스케가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점을 들어 ‘할아버지들’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 아베 노부유키가 남겼다는 예언이 우리 감정을 더욱 자극한다. 온·오프라인을 떠도는 예언은 대략 이렇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 말은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원로 정치인까지 어느 종합지 인터뷰에서 인용했다. 이 정치인은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가 최근 되살아난 일본의 군국주의 광기와 맞닿아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 교수는 “광복 때부터 소문은 떠돌았지만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제에 아주 비판적인 민족문제연구소도 아베 노부유키가 그렇게 말했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어 논문에 인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처럼 국내에서는 거짓이거나 확인되지 않은 말이 아베 총리와 일본을 비난하는 무기로 쓰이고 있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고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가르치게 했다고 해서 이런 비난이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이렇게 몰아붙인다고 하루아침에 극일이 될 리도 만무하다. 오히려 한일 두 나라가 상대를 향해 증오의 손가락질만 더하게 할 뿐이다. 다른 나라 정상을 향한 사실이 아닌 인신공격은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맞서 싸우는 상대를 닮아가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렇지만 상대가 아무리 막무가내라고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 법이다.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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