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9년 8월 18일 02시 56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대북(對北)사업 재개와 이산가족 상봉 추진 등의 선물을 들고 17일 귀경했다. 붉은색 재킷을 입은 현 회장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준비한 발표문을 읽은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현 회장은 귀경 일정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원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일정이 쌓여 있어서 주말에 오라고 했는데 좀 일찍 가서 일정이 늦어졌다”고 여유 있게 말했다.
과거 3차례 김 위원장을 만났던 현 회장은 이번 방북에서도 16일 오찬을 겸해 묘향산에서 김 위원장을 면담했다고 밝혔다. 방북 성과에 대해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
○ 현 회장 ‘한아름 선물’ 들고 서울로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이 ‘정주영 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길을 연 개척자’라고 회고했다”고 소개했다. 그가 김 위원장에게서 받은 ‘선물’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은 김 위원장과 현대가(家)의 오랜 인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이 “백화원 영빈관을 숙소로 제공받는 등 북측의 각별한 성의로 환대를 받았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화원은 북한을 방문한 국빈급 인사들이 머무는 최고급 시설로 김대중 전 대통령,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등 두 전직 대통령이 묵었던 곳이다.
현대와 북측이 금강산 및 개성 관광을 재개하기로 한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비로봉 관광과 백두산 관광을 새로 시작하기로 합의한 것은 기대 이상의 성과라는 것이 현대그룹 안팎의 평가다.
현대 측 사업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 등이 합의사항에 포함된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에 대해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라고 해서 다 말했고, 이를 들어준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현대는 남북 양측의 관계자들과 협의해 빠른 시일 내에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남북경협사업 전반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 대북사업 재개, 물꼬는 트였는데…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이 지난해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과 관련해 ‘앞으로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발언을 김 위원장의 ‘사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금강산 관광객의 ‘안전’을 보장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때문에 이번 방북이 그동안 답보 상태를 거듭해 온 남북경협 재개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여기에 비로봉 관광과 백두산 관광을 새로 시작하겠다는 합의까지 고려하면 현대아산이 주도하는 대북 경협사업 규모는 과거보다 훨씬 커질 가능성도 있다. 이현석 대한상공회의소 전무는 “현대와 북한의 이번 합의는 그간 경색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동용승 삼성경제연구소 경제안보팀장은 “이번 합의는 벼랑 끝에 몰려 있던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에 숨통을 틔워 준 셈”이라면서도 “북한은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과거 합의 사항을 강조하면서 ‘공을 남측에 넘기는’ 전략을 구사했다”고 분석했다.
○ 실제 관광 재개까진 시간 걸릴 듯
현대그룹과 북한 당국의 합의가 이뤄졌다고 해도 우리 정부가 금지한 금강산 관광 등이 곧바로 재개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통일부가 이날 “금강산 관광 재개에 앞서 사건 진상이 규명되고 재발방지 대책과 신변안전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밝힌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한국 정부의 승인이 난다고 해도 실제 관광 재개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아산 측은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에도 일부 직원이 현지에 상주하며 시설 관리를 해왔지만 종업원 등 운영 인력은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관광 중단 이후 중국동포 등으로 구성된 운영 인력이 대부분 그만뒀고, 이 인력을 다시 모집하고 훈련하는 데 1개월에서 2개월은 걸린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일 코스인 개성관광은 상대적으로 빨리 재개될 가능성이 있다.
새 사업의 진행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비로봉 관광과 백두산 관광은 삼지연 공항 현지답사와 관광 일정 구성 등 사업 설계부터 새로 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 시행될지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현정은 회장 방북 일지▼
8월 4일=금강산에서 열린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6주기에서 이종혁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방북 의사 타진, 방북 승낙 받음
8월 10일=오후 1시 50분경 경기 파주시 도라산남북출입사무소 통해 출경. 육로로 평양 방문. 2박 3일 일정이라고 설명
8월 11일=방북 일정 연장, 13일 귀환 예정 통보
8월 13일=현대아산 직원 유성진 씨 귀환. 현 회장 방북 일정 두 번째 연장,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만찬
8월 14일=방북 일정 세 번째 연장
8월 15일=방북 일정 네 번째 연장
8월 16일=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찬 겸 면담. 방북 일정 다섯 번째 연장
8월 17일=오후 2시 23분 도라산남북출입사무소 통해 입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