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만 돌아온 KAL기 1987년 11월 27일 북한공작원 김현희 씨가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폭파한 대한항공기의 잔해와 승객들의 유품이 1990년 5월 22일 김포공항을 통해 도착한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KAL기 폭파로 부친 잃은 본보 김재영 기자 ‘아버지 전상서’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희생자 중에는 중동건설 현장 근무 중 휴가차 귀국길에 올랐던 고 김상만 씨(당시 40세)가 포함돼 있었다. 고인의 아들로 현재 동아일보 국제부에 근무하는 김재영 기자가 11일 김현희 씨 뉴스를 보고 아버지께 쓴 편지를 게재한다. 김 기자는 사건 당시 초등학교 5학년(11세)이었다.》
아버지, 언젠가 만나면 꼭 여쭤 보고 싶었습니다.
1987년 11월 29일 아버지는 무슨 꿈을 꾸고 계셨을까요. ‘고생했다’ 등 두드리며 어머니를 꼭 안아주고 계셨을까요. 저와 동생들의 함박웃음을 떠올렸을까요.
마지막 편지에서 아버진 선물보따리를 한 아름 준비했다 하셨죠. 용케 휴가를 앞당겨 우릴 빨리 보게 됐다고 좋아하셨죠. 하지만 설레는 마음 싣고 바그다드를 떠난 비행기는 가족 누구의 가슴에도 내려앉지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시신 한 구, 유품 한 점도 없이. 작별인사 한마디 없이.
벌써 22년이 흘렀네요. 전 비행기를 탈 때면 늘 창가에 앉아요. 아직도 어디선가 푸른 하늘을 날고 계시지 않을까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곤 합니다.
아버지, 거기에선 평안하신지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늘 고생만 하신 우리 아버지. ‘돈 많이 벌어오겠다’며 머나먼 땅으로 떠나 3년 동안 얼마나 힘드셨나요. 희생자 115명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죠. 열사의 땅에서 비지땀을 흘린 ‘건설역군’들, 맨몸으로 꿈을 일구던 20, 30대 젊은 역군들은 한 줌의 재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하고 말았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도 참 컸습니다. 가장을 잃은 젊은 엄마들은 슬픔에 잠길 틈도 없었지요.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어머니도 3남매 키우느라 공장일 세탁일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감을 찾아 뛰어다녔습니다. 이젠 못 알아보실지도 모르겠네요. 고왔던 30대 어머니의 머리에 벌써 서리가 내려앉았으니까요.
희생자 부모들은 산목숨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이 눈도 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며 늘 대문을 열어 놓으셨던 할아버지도 두 달 전 아버지 곁으로 가버리셨죠.
오늘 TV로 김현희를 보았습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 씨 가족을 만났네요. 출근 전이던 저와 함께 TV를 지켜보던 어머니의 눈가가 붉어졌습니다. 새까맣게 타 버려 재만 남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았나 봅니다.
저는 직접 김현희를 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는 20년 전 법정에서 딱 한 번 봤다고 하시네요.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장본인을, 어머니는 20년 만에 어이없게도 TV를 통해 다시 봤습니다.
착잡했습니다. 납북 일본인 문제만 부각되면서 이 비극이 국민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됐습니다. ‘12년 만에 공개석상에 나온 그가 처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희생자 가족이 아니었을까. 비록 유가족들을 위해 조용히 살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첫마디는 나는 가짜가 아니다가 아니라 희생자에 대한 애도였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희생자 가족이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의혹 없는 진실입니다. 김현희가 가짜냐, 진짜냐가 아니라 정부의 성의 있는 태도와 위로였습니다. 김현희가 다시 공개석상에 나선 이제라도 의문점을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나요.
김현희를 볼 때 그 뒤에는 참담한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것, 냉전의 산물인 역사의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국민들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 살 때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이즈카 고이치로 씨의 애끊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네요. 끊어진 천륜을 꼭 다시 이어 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