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정서의 양극화

  • 입력 2006년 1월 27일 03시 15분


1995년 가을,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대형 슈퍼마켓 계산대에 선 모나 살린(당시 38세)의 쇼핑 카트엔 기저귀와 식료품 같은 생필품이 가득 차 있었다. 계산 액수는 한국 돈으로 20여만 원.

문제는 살린이 낸 신용카드였다. 당시 스웨덴 부총리였던 살린은 공직자용 정부 신용카드를 냈다. 살린 부총리는 곧 자기 돈으로 이를 메워 넣었지만 이 사실이 드러난 뒤 “정부 돈과 개인 돈을 구별 못한다”는 언론의 비판이 빗발쳤다.

결국 살린 부총리는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내가 속한 사민당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부총리 직을 사임했다. 고졸 학력이었지만 왕성한 정치활동으로 스웨덴 최초의 여성 총리를 눈앞에 두었던 살린의 성공신화는 거기서 끝났다.

‘정부 돈과 개인 돈을 구별 못하는’ 사례는 한국에도 비일비재하다. 지난해 말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이 특정업무경비 7720만 원을 개인계좌에 입금해 쓴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강 위원장은 살린 부총리처럼 “공정위에 누를 끼쳤다”며 사퇴하지 않았다. 대신 공정위 측은 “개인계좌로 입금해 쓰는 것은 관행이고,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은 것은 조사활동의 비밀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직함 앞의 ‘공정’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해명이지만 강 위원장은 너무 당당했다.

개인관계에서도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당당한 사람을 보면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뉜다. 직접 나서 잘못을 따지든지, 아니면 ‘그래 너 잘났다’며 말을 끊든지. 부적절한 처신을 하고도 당당한 정권 실세를 보는 요즘 국민의 눈은 후자 쪽이 아닌가 싶다.

살린의 좌절한 성공신화와는 대조적으로 이상수 노동부 장관 내정자는 ‘불법대선자금 수수 혐의 구속→사면→10·26재선거 출마→낙선→입각’이란 패자부활의 신화를 이뤘다. ‘대통령 정무특보→17대 총선 출마→낙선→대통령 시민사회수석비서관→10·26재선거 출마→낙선’을 거친 이강철 전 수석도 청와대 앞에 횟집을 열어 다시 한번 패자부활을 노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수석비서관으로 근무한 사람이 청와대 코앞에서 횟집을 열겠다는 그 ‘당당함’, 더 솔직히 말하면 ‘몰염치’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패자부활의 신화가 설이 다가오는 게 두려운 ‘사오정’, 더는 부활할 수 없는 패자(敗者)들에게 얼마나 큰 허탈감을 주는지 알기나 할까.

자신은 한 점 잘못 없이 당당하다고 느끼는데 비판을 받게 되면 다음 수순은 ‘남의 탓’이다. 노 대통령은 25일 신년 기자회견 1시간 동안 ‘세금을 정략적 공세에 이용하려는 사람들’ ‘대통령이 주장하면 바로 태도가 바뀌고…’ ‘부동산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여러 집단’ 등 무려 7번이나 ‘남의 탓’을 했다. 정권 실세의 ‘부적절한 당당함’에 입을 닫던 사람들도 ‘남의 탓’ 푸념을 들으면 가슴까지 답답해진다.

양극화 해소가 최우선 정부 과제라지만 좀 더 시급히 해소해야 할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정권 담당자들과 그런 몰염치를 보고도 속으로 삭이는 사람들의 ‘정서의 양극화’다. 노 대통령 말대로 ‘경제도 살아나고 있고, 정치도 깨끗해졌는데’ 왜 지지율이 낮은지 궁금하다면 저변에 이 같은 ‘정서의 양극화’가 깔려 있는 게 아닌지 곱씹어 볼 일이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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