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영언/金배지 銀배지 銅배지

  • 입력 2004년 1월 20일 16시 28분


어느 정치인이 국회의원의 ‘등급’을 세 가지로 분류한 일이 있다. 수도권 등 경쟁이 심한 지역에서 당선된 사람은 금배지, 지역주의 벽이 두꺼운 특정지역에서 당선된 사람은 은배지, 전국구의원은 동배지다.

얼마나 어렵게 당선됐느냐를 기준으로 보면 일리 있는 분류다. 수도권은 대결이 그만큼 치열했지만 영호남지역에선 특정정당 공천만 받으면 쉽게 당선됐던 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정치현실이었다. 전국구의원은 선거전을 발로 뛴 지역구후보보다 한결 수월하게 배지를 단 사람이다. 그렇다면 서울 출신의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지역주의에 도전하겠다며 지역구를 대구로 옮기기로 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당선된다면 ‘특별 금배지’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디서 당선됐느냐, 지역구냐 전국구냐 하는 것이 재미로는 몰라도 국회의원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당선 후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느냐에 따라 등급이 매겨져야 옳다. 그리고 여기에는 은배지 동배지가 존재할 수 없다.

교육 복지 등 전문분야에서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금배지다. 사회 곳곳에 쌓인 부조리와 모순을 청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의원도 금배지다.

정책보다는 선동이나 야유에 강하고 상대 정파를 겨냥한 ‘아니면 말고’식의 폭로에 치중하는 의원이나 총선 표를 의식해 국가적 이해가 걸린 정책사안에 등을 돌린 의원, 이해득실에 따라 이당 저당 옮겨 다닌 기회주의적인 의원은 모두 배지 달 자격이 없다.

부패 비리의원은 말할 것도 없다. 불법 대선자금 비리나 개인비리에 연루돼 감방에 갇혔으면서도 ‘옥중출마’를 외치는 일부 의원들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과거도 현재도 국회엔 금배지보다 배지 달 자격 없는 의원이 더 많았던 셈이다. 며칠 전 발표된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의 16대 국회 의정활동 평가에 따르면 능력과 인간적인 면에서 평균 이하인 ‘퇴출형’ 의원은 126명, 두 가지를 겸비한 ‘모범형’ 의원은 122명이었다. 지금 출마를 준비 중인 정치신인 중에도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이 적지 않다.

17대 국회는 ‘모범형’ 선량으로 가득 차야 한다. 정치꾼이 아니라 정책을 소화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 지역보다 국가적 과제를 우선시하는 사람, 고리타분한 옛날식 사고에서 벗어나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고 그것에 적응할 줄 아는 사람, 나만이 아닌 상대의 생각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의사당에 모여 생산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 각 정당에서 일고 있는 물갈이 운동이나 잇단 ‘불출마선언’ 등도 결국은 그런 일류 정치인을 찾자는 정치권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오랜만에 가족, 친척, 고향 선후배들이 모이는 설 연휴에 총선 얘기가 빠질 수 없다. ‘그래도 우리 지역에서는 ○○당을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많이 나올 것만 같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가 그랬다. 그러나 이제 ‘당 보고 찍어서 무슨 소용이야, 인물을 보고 찍어야지’ 하는 소리가 많이 나왔으면 싶다. 좋은 정치의 기본은 ‘마음속의 당파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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