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수영]정치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동아일보

홍수영 오피니언팀장
홍수영 오피니언팀장
지난해 말 스스로를 ‘보수 본류’로 칭하는 원로 교수 몇 분과 저녁 자리를 했다. 대화는 “보수를 망친” 윤석열 전 대통령과 “제 발에 걸려 인생을 망친”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 대한 성토로 흐르더니, 이내 지지율 침체에 빠진 국민의힘과 한동훈 전 대표로 향했다.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이력과 함께 ‘공동 책임’, ‘배신자’라는 거친 표현도 나왔다. 정치에서 조폭끼리나 쓸 법한 배신자론에 동의하지 않기에 사실 반쯤 흘려들었다. 그런데 배신자론의 멍에를 썼던 바른정당 계열 전직 의원들에게 최근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싸움이 터졌다, 이겨야 한다”는 본능

한 전 대표는 틀리지 않는 말을 할 때가 많다. 정작 그 말에 걸맞은 지지를 다 받지는 못한다. 그도 알고 있다. “누가 이런 말씀 하시더라.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당신 말 틀리다고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어려운 상황에서 옳은 결정을 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역풍이나 반대 의지는 있기 마련”이라고 자신을 변호한다. 비단 혁신 과정에서의 반작용 탓일까. 정치에서는 팩트 못지않게, 어쩌면 더 국민의 인식이 중요하다. 표면으로 드러난 말과 국민의 인식을 만드는 태도와 행동에 괴리가 있는 것이다.

당내 분열의 상징이 된 ‘당원게시판 사태’가 이를 오롯이 보여준다. 한 전 대표는 2024년 11월 처음 의혹이 제기된 뒤 오래 외면했다. 20일 만에 나서 격정 속에 14분간 쏟아낸 말은 “(익명게시판 글을) ‘밝히라’, ‘색출하라’고 하는 건 자유민주주의 정당에서 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지도자라면 자신의 문제 앞에 ‘원칙’을 들어 방어막을 쳐선 안 된다. 국민은 이를 윤리로 여긴다.

이달 당 윤리위의 제명 징계 결정에 그가 내놓은 유감 표명의 첫마디도 “명백한 조작이자 정치 보복”이었다. 이어진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해 (중략) 송구한 마음”은 부록에 가까웠다. 이 정도라면 1년여 전 못 할 까닭도 없는 유감 표명이었다. ‘조작’이라 하든 ‘과장’이라 하든 당의 조사 결과에는 허점이 있었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에 2분 5초짜리 녹화 영상을 올려 하고픈 말만 하는 ‘셀럽 사과’를 대중은 사과라고 보지 않는다.

장동혁 대표의 단식 국면에선 또 어떤가. 명분을 쥐고서도 고립을 자초했다. 이 단식을 두고 윤(尹)과의 절연, 한 전 대표의 제명 논란에서 도망가려는 ‘런(run)단식’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사실 그리 봤다. 그렇더라도 얽힌 실타래를 풀 계기였다. 강성 보수와 거리가 먼 정치인들도 단식장을 찾아 손을 잡고 격려했다. “부부싸움을 해도 밥은 먹여 가며 싸우라”는 게 통상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싸움이 벌어지면 한 전 대표는 이기려고만 든다. 어떤 싸움인지 헤아리기보다 일단 본능이 작동하는 듯하다. 같은 일이 반복되니 한때 장점이었을 기질이 이제는 그의 정치적 확장성을 가로막고 있다. 때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했다. 정치 영역에서 그보다 더 들어맞는 말도 없다. 정치인이 국민들의 인식을 논박하려 들면 필패한다.

한동훈 운명은 張에 달려 있지 않다

건전한 보수 중 현재 시점의 장동혁을 ‘보수의 미래’라고 하는 이는 없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아직은 ‘보수의 자산’이라고 한다. 그의 정치적 운명은 이르면 29일 결정될 장 대표의 제명 조치에 달린 게 아니다. 운명을 가르는 것은 그 자신이다. 정치는 성적순이 아니다. 논리와 언변으로 무장한 한 전 대표는 달라질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국민의 인내심이 바닥난다는 것은 한동훈 개인의 불행이자 인재의 씨가 마른 보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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