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재회담 무산/협상전말]불발로 끝난 「핑퐁협상」

  • 입력 1998년 11월 10일 07시 54분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은 청와대 영수회담이 계획됐던 9일 10여차례에 걸친 총무간 접촉 및 총장회동 등을 통해 회담 개최문제를 논의했으나 끝내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다.

양당은 이날 제의와 역제의를 주고받는 ‘핑퐁식’협상을 벌였지만 9일 회담 계획이 끝내 무산됐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 방중(訪中)하루전인 10일 오전까지 절충을 계속키로 했다.

▼ 잠정합의 사항 ▼

양당은 하루전인 8일 오후까지 합의문 골격에 의견 접근을 봤었다. 합의문은 전문을 포함, 모두 5개항. 이는 △여야 경제협의체 구성 △개혁 및 민생현안 정기국회 회기내 처리 △경제청문회 개최 △정치관계법 개정 △지역갈등 해소를 위한 제도적 장치강구 등이다. 하지만 경제청문회 개최시기와 한나라당이 요구한 추가3개항의 합의문 포함여부가 마지막까지 걸림돌로 작용했다.

국민회의측은 청문회 개최시기를 예산안처리시한(12월2일) 다음날인 3일로 못박자고 주장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①총격요청사건에 대한 공정 수사 ②보복 표적사정을 통한 인위적 정계개편 중지 ③불법감청 및 고문행위 근절 등 3개항을 추가요구했다.

▼ 9일 오전 ▼

한나라당 박희태(朴熺太)총무는 9일 오전 국민회의측에 3개항의 추가요구사항의 수용을 종용했다. 하지만 국민회의 한화갑(韓和甲)총무는 “대통령에게 확답을 받아오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불가 입장을 천명.

한총무는 오전 10시경 당사앞 승용차에 올라 카폰을 통해 박총무와 통화. 한총무는 한 손에 수화기를 든채 허공을 향해 연방 삿대질을 했고 다시 조세형(趙世衡)총재권한대행실로 올라가 박총무에게 전화로 “이회창(李會昌)총재가 대통령을 만나서 얘기하면 되는 것 아니냐” “합의가 됐는데 왜 뒤집느냐”며 고성.

▼ 9일 오후 ▼

물건너 가는 듯했던 영수회담은 오후들어 양당총무가 다시 접촉을 시작하면서부터 활기. 이번에는 박총무가 한총무에게 전화를 걸어 “합의문 없이 회담에 임하되 합의사항은 합의문으로, 합의가 안된 부분은 발표문 형식으로 공개하자”고 수정제의, 한때 협상타결 임박설이 나돌았다.

한나라당측의 수정제의를 받은 한총무는 조대행 등과 구수회의를 마친 뒤 박총무에게 “그쪽 제의를 수용할테니 대신 경제청문회 개최시기를 명문화하자”고 역제의했다. 그러나 경제청문회 개최문제에 소극적인 한나라당측은 이를 거부했고 한총무는 “결국 경제청문회를 하지 않겠다는 얘기 아니냐”고 맞서 협상은 또다시 미궁에 빠졌다.

▼ 9일 밤 ▼

협상이 난항을 겪자 국민회의 정균환(鄭均桓), 한나라당 신경식(辛卿植)사무총장이 바통을 넘겨받아 밤늦게까지 협상을 벌였다. 총장회담에서 한나라당측은 “경제청문회 시한을 못박고, 추가요구 3개항중 ‘보복 편파사정과 인위적 정계개편 금지’라는 ②항을 제외한 ①③항을 철회하겠다”는데까지 후퇴. 양당의 합의내용을 보고받은 한나라당 이총재는 오후 8시50분경 저녁을 먹고 있던 박총무를 급히 호출, 국민회의 한총무와의 재접촉을 지시.

박총무로부터 총장합의사항을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한총무는 조대행 등 당 수뇌부와 구수회의를 벌였으나 “합의문에 편파, 보복사정이란 말이 포함돼서는 절대 안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국민회의측은 ②항을 합의문에서 빼는 대신 ‘총격요청사건에 대한 공정수사’내용이 담긴 ①항을 넣어줄 수 있다는 입장을 박총무에게 통보. 그러나 한나라당측도 “②항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고수했고 이같은 답변을 들은 한총무는 자정무렵 박총무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협상은 더이상 안되겠다”고 통첩, 협상은 다시 10일 오전9시 마지막 총무회담으로 넘겨졌다.

〈윤영찬·김정훈기자〉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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