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호섭/밀실합의는 안된다

  • 입력 1997년 10월 29일 20시 13분


김대중(金大中)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가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합의사항은 김대중총재로 후보 단일화, 선거전의 공동운영, 선거승리 후 정권의 공동구성 및 내각제개헌의 실현 등으로 보도되고 있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세력과의 연대는 당연하며 투표시 사표(死票)를 방지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국가의 헌정구조를 공개적인 논의 없이 밀실에서 두 정파간 타협에 의해 고치기로 합의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 「DJP 내작제」유감 더욱이 최근 우리 정치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6월항쟁에서 직선 대통령제를 얻기 위해 우리 사회가 치렀던 기회비용이 얼마나 엄청났던가를 생각해 보면 내각제 개헌 실현을 후보단일화를 위한 매개변수로 삼은 것은 우리 정치의 발전에 좋지 않다고 본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이미 오랫동안 확립되어 시행되고 있는 어떠한 형태의 권력구조를 특정 정치지도자나 특정정당의 정략이나 당리당략을 위해 바꾸도록 한다면 민주정치의 공고화와 정치안정이라는 면에서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48년 정부수립 이후 우리 정치에서 실제로 내각제를 실시한 기간은 9개월에 불과하다. 우리 정치사에 있어서 권력구조에 관한 논의는 언제나 소수의 정치인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 현재의 DJP연합에서도 보이고 있다. 50년대와 80년대, 90년대에 제기되었던 내각제 주장이나 논의는 직선 대통령제하에서 집권의 가능성이 희박한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정략적 계산아래 이루어졌다. 80년대 중반 전두환(全斗煥)정권은 걸출한 야당 지도자에 대항할 인물이 없었던 집권당이 대통령 직선제에서 패배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국회 안정세력 확보를 통해 권력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 내각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의 성공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채택되었다. 노태우(盧泰愚)정권하에서도 집권당이 14대 선거에 내세울 마땅한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다시 내각제를 거론하였고 90년 3당합당은 세 정당지도자들의 내각제 합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문민정부에서 내각제가 다시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집권세력에서 밀려나 자유민주연합을 구성한 김종필총재가 내각제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4대 대통령선거 패배 후에 정계를 은퇴하였던 김대중총재도 6.27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내각제를 언급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김대중총재는 정계복귀를 하더라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을 확신할 수 없었으며 반(反)김영삼(金泳三) 세력과 연대하여 국회내 다수를 차지할 경우에는 내각제개헌이 자신의 집권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었던 것이다. ▼ 국민적 논의가 먼저 시행되던 내각제를 군사쿠데타로 전복하였고 대통령제에서는 2인자로 자처하던 김종필총재가 현재 내각제에 집착하는 것은 본인의 대통령 당선가능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난번 총선에서 여당의 내각제 개헌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표를 달라고 하던 김대중총재가 현재로는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도 불구하고 내각제에 합의한 것은 확보하고 있는 지지세력에다 김종필총재를 지지하는일부보수진영의세를 추가하여집권가능성을높이자는것으로 이해된다. 권력구조에 관한 국민적 논의없이 당리당략의 차원에서 내각제가 합의된 것은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국민을 들러리로만 세우겠다는 것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국민의 지지없는 권력구조 개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왜 이 시점에 내각제 개헌이 필요한지에 대해 논리적 실증적으로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김호섭(중앙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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