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해리 포터’와 위장 미혼

  • 동아일보

영화 ‘어쩌다, 결혼’ 속 계약 결혼을 도모하는 남자와 여자. 둘은 결국 진짜 사랑, 진짜 결혼으로 끝날까? BA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어쩌다, 결혼’ 속 계약 결혼을 도모하는 남자와 여자. 둘은 결국 진짜 사랑, 진짜 결혼으로 끝날까? BA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1]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강남 1970’ 같은 조폭 영화를 통해 유하 감독은 패싸움(전문용어로 ‘다구리’) 연출의 장인으로 우뚝 섰지만, 사실 그의 일관된 관심사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물결이 개인의 운명을 포식하는 비극적 과정을 포착하는 데 있어요. 등장인물들은 예외 없이 욕망의 하수인이고 변하는 시대가 빚어낸 사상자들이어서, 끝까지 살아남아 목표를 성취하는 자마저도 자기 삶의 진짜 주인처럼 취급되는 경우는 드물지요.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년)도 그래요. 혀를 날름거리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키스신으로 회자됐던 이 영화는 대학 시간강사 감우성과 조명 디자이너 엄정화의 소개팅 장면으로 시작해요. 첫눈에 맘에 들어 밤까지 함께 있게 된 둘은 “심야 택시비보다 싼 모텔”로 가 원나이트를 즐겨요. 어차피 돈도 없고 미래도 없는 이 남자에게 결혼은 언감생심. 질펀한 섹스를 지속하며 둘은 어느새 진짜로 사랑하게 되지만, 안정된 결혼 생활이 필요했던 여자는 결국 눈 밑에 큰 사마귀가 난 못생기고 부유한 의사와 결혼하지요. 결혼 후에도 여자는 남자의 자취방을 제2의 신혼집 삼아 들락거리며 ‘사랑과 결혼은 별개’임을 입증하려 하지만, 남자는 이내 자괴심에 사무쳐요. 비혼주의라는 ‘쿨’하게 여겨지던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기실은 결혼할 형편이 못 되는 비루한 스스로를 포장해온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까요.

[2] 이런 맥락에서, 영화 ‘어쩌다, 결혼’(2019년)은 사랑과 결혼을 바라보는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만들어요. 남자(김동욱)는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으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처지. 실제론 싱글맘 제빵사를 사랑하건만, 그녀는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는 자기 처지를 의식하며 남자를 밀어내고 있죠. 한편 여자(고성희)는 부모의 등쌀에 못 이겨 하루빨리 결혼해야 하지만 마땅히 좋은 남자가 없어요. 이 남자와 여자가 맞선에서 만나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둘은 딱 3년간만 계약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서로의 매력을 알아가며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해요. 아니나 다를까,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둘이 위장 결혼을 하려 했던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지요.

자, 그럼 영화의 결말은 어찌 될까요? ①둘은 사랑이 새순처럼 돋아났음을 새삼 확인하며 ‘진짜’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엔딩. ②둘은 위장 결혼을 포기하고 제 갈 길 간다는 열린 엔딩. 정답은? 놀랍게도 ②예요. 둘은 허그 한 번 하고 뒤돌아선 뒤 각자의 사랑을 찾아 떠나죠. 가짜 사랑이→진짜 사랑으로 변하면서→진짜 결혼으로 끝난다는 로맨스코미디 공식이 산뜻하게 뒤틀리지요? 결혼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세태를 농담 같은 진담으로 일갈하는 것 같아 뒤끝이 마냥 흡족하지만은 않아요.

[3] 결혼은 제도예요. 모든 제도는 집단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마련되죠. 그래서 우린 결혼이 파괴되는 영화 속 순간들을 통해 극도의 불안과 동시에 들키고 싶지 않은 쾌감을 경험해요. 며느리와 사랑에 빠지는 시아버지를 다룬 영화 ‘데미지’(1994년)로 많이 알려진 프랑스 루이 말 감독은 이미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인 1958년, 당시 ‘누벨바그의 여신’ 잔 모로를 주연으로 한 문제작 ‘연인들’을 통해 결혼은 물론 사랑의 개념조차 해체해 버리는 혜안을 보여줬어요.

주인공인 ‘잔’은 결혼 8년차 귀부인. 돈 많은 못생긴 신문사 사장인 남편 ‘앙리’와의 관계는 시들해요. 사실 그녀는 잘생기고 매너 좋고 가문 좋은 남자 ‘라울’과의 내연 관계로 사랑의 허기를 채우고 있죠. 밀회를 즐기고 집으로 차를 몰던 그녀. 그만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때마침 지나가던 힘 좋아 보이는 청년 ‘버나드’의 차를 얻어 타고 귀가해요. 그날 밤, 기막힌 시추에이션이 펼쳐져요. 그녀의 대저택에서 잔은 앙리(남편), 라울(정부·情夫), 버나드(우연히 만난 청년)와 함께 아슬아슬한 만찬을 즐겨요. 아, 바람이나 쐴 겸 심야에 정원 산책을 나온 잔. 때마침 잠 못 이루는 청년 버나드와 마주친 그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레방아 옆에서 정사를 나누죠. 그리고 이튿날 아침 해가 밝아요. 남편과 정부가 황망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청년의 차를 타고 환호하며 집을 뛰쳐나가는 잔의 모습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려요.

어때요? 결혼도 사랑도 쓰레기 종말처리장으로! 여자가 최종 선택한 남자는 결혼한 남자도, 사랑하는 남자도 아닌, 새로운 남자였으니까요.

[4] 맞아요. 결혼은 미친 짓인지 몰라요. 영화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궁극의 악당 ‘볼드모트’와 결혼은 그래서 비슷해요. 결혼도 볼드모트처럼, 너무너무 무서워 그 이름조차 부르기 두려운 시대가 아닐까 말이에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결혼을 결혼이라 부르지 못하다 보니, ‘위장 미혼’이란 눈부신 아이디어까지 아파트 청약시장에서 탄생하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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