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천국]<실크우드>,거대 조직에 항거한 나약한 개인의 삶

  • 입력 2000년 9월 15일 10시 28분


어쩌면 그저 평범한 자동차 사고로 종결될 뻔한 이야기. 1974년 11월13일 오클라호마의 황량한 대지 위에서 벌어진 카렌 실크우드(메릴 스트립)의 죽음은 그렇게 잊혀질 수도 있는 평범한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크우드>는 그녀의 억울한 삶을 다시 세상 속으로 불러내 '순교의 제의'를 치러주었다.

빽 없고 돈 없어 서러운 여자 실크우드는 오클라호마 핵 공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다. 그녀는 남편과 헤어진 탓에 두 아이조차 맘껏 보지 못하고, 급여는 언제나 주머니에서 달랑거릴 만큼 적다.

그러나 실크우드가 일하는 곳의 근무조건이 어떤지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 주어진 이 모든 악조건은 차라리 호화롭게 느껴질 것이다. 핵 공장에서 휴가도 반납한 채 살아야 하는 실크우드는 방사능 오염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으며, 오염이 확인된 순간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하는 억압된 몸이다.

영화는 윗사람들의 명령에 감히 거역해 본 적 없는 그녀가 방사능 오염판정을 받고, 이 난폭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애쓰다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과정을 차분히 보여준다. 실화를 영화화했을 때 흔히 범하기 쉬운 과도한 휴머니즘이나 낭만 따위는 없다. 실크우드는 결코 시대의 영웅이 아니며, 영화를 만든 마이크 니콜스 감독 역시 그 점을 잊지 않고 올곧게 담아냈다.

덕분에 <실크우드>(83)는 미국 사회의 부패상을 정공법으로 다루면서도 피켓 시위에서나 흘러나올 법한 교조적인 멘트를 교묘히 피해갔다. <실크우드>의 매력은 바로 그것, 독설이 아닌 연민의 어조에 있다.

영화 속에서 실크우드는 뭔가 채워지지 않은 욕망 때문에 갈등하지만 그 허전함의 진원지가 어딘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는 영웅이 아니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나약한 캐릭터로 남았다. 풍선을 불거나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거나 입을 무언가로 통통하게 막아버림으로써 욕망을 채우는 여자.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새롭게 시작한 드류(커트 러셀)와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순수한 사랑조차도 거대 사회의 조직적인 음모 앞에선 거세당하기 십상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실크우드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는 드류가 이제 더 이상 자신과 몸을 섞길 거부하게 될까봐 두렵다. 고민하는 실크우드 앞에서 드류는 "넌 굉장한 여자야. 넌 언제나 날 꼼짝 못하게 만들어"라고 말하는데, 예상했던 대로 둘 사이의 관계는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다.

여기에 실크우드의 노동자 친구 돌리(쉐어)가 표출하는 동성애적 코드가 맞물리면서 영화는 더욱 애잔한 삶의 진혼곡으로 변주된다. 실크우드와 드류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던 날 밤, 돌리는 혼자 창 밖을 바라보며 허전한 마음을 달랜다. 이른 아침 거실로 나온 실크우드는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돌리에게 묻는다. "무슨 일 있어?" "널 사랑해, 아니 널 사랑하지 않아." 횡설수설하며 끝내 진심을 고백하지 않는 돌리의 동성애적 사랑은 실크우드가 겪어야할 시련만큼이나 서글프다.

그래서 <실크우드>는 70년대 한국 노동계의 현실을 연민에 찬 어조로 써내려 간 조세희의 소설을 읽는 것 마냥 보는 내내 복받치는 설움을 준다. 특히 실크우드가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흐르던 음악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신의 축복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슬픔을 한껏 증폭시킨다.

몸은 오염됐으나 정신은 오염되지 않았던 그들. 미국의 70년대는 이 하찮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결코 인간다운 삶을 안겨주지 않았고, 실크우드는 이런 사회의 푸대접 속에서 피다만 꽃처럼 사라졌다.

'비포 앤 애프터(before and After)'로 나눠서 이야기한다면, <실크우드>는 '비포'만 전해줄 뿐 결코 '애프터'를 전해주진 않는다. 끝을 단단하게 여미지 않은 채 실크우드가 죽음을 당하는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중단한다. 그러나 영화 밖에선 분명 '애프터'가 존재했다. <실크우드>가 개봉된 후 사건은 재수사에 돌입했고, 결국 그녀의 죽음은 오클라호마 핵 공장과 정부의 조직적인 음모였음이 밝혀졌다. 이것은 분명 영화가 부패한 사회의 방부제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 멋진 영화 밖 액션이다.

할리우드 '영화공장'에서 제조됐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 영화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보다 더 소중한 진실의 보고서인지도 모른다.

<실크우드>가 이처럼 사실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연기의 힘이다. 메릴 스트립의 표정 연기는 모든 사람들의 목을 조를 만큼 압도적이며, 지금은 액션 스타로 돌변한 커트 러셀의 연기는 이두박근을 부풀리는 근육액션보다 훨씬 신선하다.

코미디언 출신의 마이크 니콜스 감독이 연출을 맡고,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시나리오의 일급 제조사인 노라 애프런이 각본에 참여했다는 것도 이채로운 점 중 하나.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80년대 중반 이후 <워킹걸>(88) <버드게이지>(96) 같은 범작을 만들며 많이 망가졌지만, 그전까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66) <졸업>(67)같은 수준작을 만들어낸 관록있는 중견이다. <실크우드>는 마이크 니콜스 감독이 만든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진실하고, 현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점에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안겨준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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