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서 산화 임일병, 66년만에 가족 품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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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北서 유해 발굴 2012년 국내로… 故임병근 일병으로 신원 확인
함께 온 유해 9位는 가족 못찾아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임병근 일병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가 21일 조카 임현식 씨(왼쪽)에게 전달되고 있다. 오른쪽은 유해발굴감식단장인 이학기 대령. 국방부 제공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임병근 일병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가 21일 조카 임현식 씨(왼쪽)에게 전달되고 있다. 오른쪽은 유해발굴감식단장인 이학기 대령. 국방부 제공
‘세계 2대 동계전투’라고 불리는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7일∼12월 13일)에서 중공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20세 청년의 유해가 66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국방부는 ‘미국 합동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 사령부(JPAC)’가 발굴한 뒤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보관하던 장진호 전투 전사자의 신원이 임병근 일병으로 확인됐다고 21일 밝혔다. 국방부는 전사자 신원 확인 통지서와 위로패, 유해 수습 당시 관을 덮은 태극기 등을 이날 장조카인 임현식 씨(71)에게 전달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1930년생인 임 일병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8월 16일 20세 나이로 미 7사단 카투사(KATUSA)로 입대했다. 그는 같은 해 12월 6일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사(戰史)에서도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될 정도로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힌다. 장진호 지역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로 겨울밤 기온이 영하 45도까지 떨어진다. 당시 미 해병 1사단은 미 병력(1만5000명)의 10배이던 중공군(13만 명)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며 중공군의 함흥 탈취 시도를 막았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사투에 힘입어 주민 10만 명을 흥남부두를 통해 피란시킨 ‘흥남철수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

임 일병의 유해는 북한과 미국 간 합의에 따라 JPAC가 2000∼2005년 북한 지역에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하던 2001년 발굴됐다. JPAC는 미군 유해를 발굴하며 국군 유해 12구도 함께 발굴했다. 유해 12구는 한미 공동 감식을 거쳐 2012년 5월 국내로 봉환됐다. 당시 곧바로 유가족을 찾은 김용수, 이갑수 일병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임 일병 유해는 지난해 11월에야 유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유전자(DNA) 정보 대조 절차 등을 거쳐 올 2월 유전자 일치 여부를 확인했다. 남은 유해 9구는 아직 유가족을 찾지 못했다.

장조카 임 씨는 “4남 1녀 중 넷째인 삼촌이 다른 형제들을 대신해 자원입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올해부터는 삼촌이 돌아가신 날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돼 가슴에 맺힌 한을 풀었다”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임 일병 유해를 6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할 예정이다. 남은 유해 9구는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유해발굴감식단 유해보관소에 안치된다. 이학기 유해발굴감식단장은 “비무장지대(DMZ) 북쪽에 호국용사 유해 4만여 구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북한과 협의만 된다면 언제든 유해를 발굴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장진호 전투#임일병#유해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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