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범 가둔 독방, 격벽으로 막은 운동장… 감옥에 새겨진 식민 통치[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동아일보
입력 2026-01-07 23:002026년 1월 7일 2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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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신협약 이후 사법 주권 붕괴… 일제, 도성 밖에 근대식 감옥 신축
독립운동 잇달아 수감자 수 급증… 지속적 증축으로 대규모 시설 돼
사상범 독방 수용해 의지 억눌러… 주변에 옥바라지 마을까지 생겨
일제가 지은 근대식 감옥 서대문형무소의 현 모습.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서대문형무소와 옥바라지 마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형벌 제도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육체에 직접 고통을 가하는 ‘신체형’ 중심에서 근대 이후 구금을 통해 자유를 제약하는 ‘자유형’ 중심으로 변화했다. 19세기 말 조선도 형벌 제도의 근대화를 위해 서양식 감옥 건립을 모색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이런 중에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 이른바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한일신협약의 핵심은 각 부 차관을 비롯해 정부의 주요 관직에 일본인을 직접 임명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뿐만 아니라 내정도 실질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이때 법부 차관으로 부임한 도쿄공소원 검사장 출신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는 일본 가나자와 감옥 전옥(典獄·형무소장)이었던 가미노 다다다케(神野忠武)를 법부 서기관으로 기용했다. 일본식 감옥 행정 제도를 신속하게 도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구라토미와 가미노가 주도해 1908년 10월 경성감옥을 신축했다.
새 감옥의 위치는 도성을 약간 벗어난 독립문 부근 의주로변으로 정했다. 돈의문을 나가 평안북도 의주까지 가는 의주로는 조선시대부터 중국과의 공식 교통로로, 전통적으로 통행량이 많은 대로였다. 또 동서로는 인왕산과 안산이 둘러싸고 있고, 남북으로는 가파른 무악재 고개가 놓여 있었다. 사방이 어느 정도 막혀 있으면서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아 감옥의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였다. 서대문의 경성감옥은 병합 이후 마포에 새로운 경성감옥을 신축하면서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다시 형무소라는 명칭을 도입하면서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다.
처음 신축했을 때 서대문형무소의 규모는 전체 4800여 평, 수감 정원은 500명이었다. 그런데 이미 1908년 수감자가 835명에 달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 투쟁이 빈발해 체포·수감된 인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병합 이후에도 수감자는 점점 증가해 1915년에는 벌써 정원의 세 배가 넘는 1686명에 이르렀다. 3·1운동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기는 했지만 1919년에는 무려 3000명 이상이 수감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형무소를 지속적으로 증축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전체 규모 1만6500여 평, 수감 정원은 2500명에 이르렀다.
수감자 운동시설인 격벽장. 운동할 때 대화하거나 도주하는 것을 막으려고 부채꼴 모양의 격벽을 세워 감시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1935년 현재 서대문형무소의 시설을 보면 사무청사 2개 동, 기결수 옥사 8개 동, 미결수 구치감 6개 동, 한센병자 격리 옥사 1개 동, 노역 공장 14개 동, 그 밖에 취사장·창고·사형장·격벽장(隔壁場) 2개 동, 망루 6개 규모였다. 눈에 띄는 시설은 격벽장이다. 전체적으로 부채꼴 모양에 벽을 쳐 칸칸이 나눠 놓은 수감자의 운동시설이다. 수감자들 사이의 접촉을 막으면서 한 명의 간수가 여러 명의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이른바 근대 감옥의 원리를 잘 구현한 ‘선진적인’ 시설로 선전됐다.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독립운동 사건을 겪으면서 총독부가 형무소 ‘개선’에서 최우선 과제로 여기게 된 것은 사상범을 독방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OO운동 사건’으로 수감된 사상범이 일반범을 ‘물들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 형무소 관리들의 좌담회에서 한 참석자는 병합 초기 사상범과 일반범이 혼거한 상황에서 “큰 소리로 독립운동 연설을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박수로 이에 공명하는 자가 있어 그 혼잡은 도저히 비할 바 없었다”고 회고했다(일제의 한국사법부 침략실화, 1978년).
이런 상황의 ‘심각함’을 느낀 총독부는 대공황을 통과하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29년 예산 30만 원을 책정해 서대문형무소의 사상범 전용 옥사 계획을 수립했다. 사상범을 독방에 수용하는 전용 옥사는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33년 연건평 1300평 규모로 준공했다. “보통 죄수의 사상이 사상범의 사상에 감염되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상범을 격리시켜 복역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형무 행정을 집행”하는 것이 드디어 가능해진 것이다(동아일보, 1933년 3월 28일).
사상범을 수용하는 독방 옥사.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사상범의 독방 생활은 매우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05∼1977)은 중동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41년, 조회 시간에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지 않고 수업 중 ‘민족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무려 3년 7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는 1976년 간행된 ‘나의 옥중기’에서 형무소의 독방을 ‘죽음의 집’ ‘어느 날 어느 밤이고 문이 열리지 않는 곳’ ‘일하는 것도 일 없는 것도 벌인’ ‘모든 의욕을 눌러 죽이는’ 곳이라고 회고했다.
형무소의 존재는 단지 그 자체로 그치지 않았다. 주변의 도시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대문형무소 주변에는 이른바 ‘옥바라지 마을’이 형성됐다.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의 존재 때문이었다. 당시 법령에 따르면 미결수는 양식이나 의류, 침구 등을 ‘자변(自辨·자기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지방에서 올라온 미결수의 가족이 형무소 주변에 오래 머무는 경우가 생겼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여관이나 밥집 등이 늘어나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이 193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적도(赤道)’에는 형무소 주변의 옥바라지 마을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붓고 쫓기는 대경성은 예까지 밀려나왔다. 건너 산 밑까지 올망졸망 초가집이 들어붙었다. 큰길이 생기고 버스가 다니고 나날이 번창해 가건마는 암만해도 감옥 냄새는 빠지지 않는다. 독립문을 지나서부터 형무소 초입까지 형무소 사식 차입소, 감옥밥 파는 집, 형무소 피고인 차입소, 변당 차입소 간판들이 지붕을 디디고 선 것만 보아도 어쩐지 으스스해진다.” 서대문형무소가 위치한 서대문구 현저동과 길 건너편 종로구 무악동 일대의 지목은 병합 초기에는 대부분 ‘전(田)’이었으나, 점차 ‘대(垈·대지)’ 비율이 높아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큰 사건이 일어나 갑자기 미결수가 많아지면 옥바라지 마을도 덩달아 북적거렸다. 3·1운동 당시의 보도를 보면 “서대문 감옥 재감자 수는 그 감옥이 시작된 뒤로 처음 보는 기록이라. 그중에서 1625인은 이번 소요 사건에 관한 미결수들”인데, “죄인이 이와 같이 일시에 늘어난 까닭으로 먹는 것이 일시에 늘어서 지금은 하루에 17섬의 곡식을 먹어버리”고, “이에 또 차입밥을 먹는 사람이 적지 아니”하여 “차입밥을 먹는 사람은 대략 600명인즉 세 끼로 말하면 2800끼의 많은 벤또가 매일 감옥으로 들어오는 터라 끼니 때가 되면 벤또가 산같이 쌓”였다고 전한다(매일신보, 1919년 5월 15일).
기본적인 먹을 것과 입을 것 이상의 옥바라지도 있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학생들이 수감된 학교의 교사 중에는 “각기 자기가 맡은 과정의 교과서와 교과 보충 인쇄물 등을 차입시켜 옥중에서 상학을 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동아일보, 1926년 6월 23일).
일제가 수감자들의 탈옥을 막고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10m 높이의 망루와 4m 높이의 벽돌담의 현재 모습. 사진 출처 서대문형무소역사관광복 후 서대문형무소는 1967년 미결수 전용의 서울구치소로 기능이 바뀌었다가, 서울구치소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이전했다. 형무소 건물은 일부를 남겨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던 옥바라지 마을의 흔적은 2016년 일대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하면서 사라졌다. 그 대신 무악동에 ‘독립운동가 가족을 생각하는 작은 집’이라는 기념공간을 조성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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