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기관장, 주요 금융사 수장들이 새해 내놓은 신년사에 공통된 문구가 있다. ‘생산적 금융’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생산적 금융을 강하게 독려했고, 은행을 비롯한 금융사들이 경쟁적으로 생산적 금융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일반인에게 생산적 금융이라는 말은 은행 약관 용어만큼 낯설고 어렵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방법론도 보이지 않는다.
금융권에서조차 생산적 금융 개념을 잘 모르는 실정이다. 최근 만난 증권사 대표는 “생산적 금융을 어떻게 준비하는가”란 기자의 질문에 “일단 직원들에게 어느 범위까지를 생산적 금융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고 답했다.
금융위원회 보도자료에 생산적 금융은 ‘기존 금융권이 집중한 부동산 금융이 아닌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과 벤처기업 등 생산적 분야에 투자되는 금융’이라고 돼 있다. 눈앞의 수익을 따지기보다 성장 잠재력과 혁신성이 높으면 적극 투자한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혁신 금융’이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은 당장 어느 기업에 투자할지부터 고민이 크다. 지난해 말 만난 국내 한 금융지주사 회장은 “생산적 금융을 하고 싶어도 막상 지원할 곳을 찾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애써 투자할 만한 기업을 찾으면 이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고 한다. 국내 금융사가 지원한 기업이 해외로 나가 버리면 결과적으로 국내에 돈이 도는 효과가 미미하다. 생산적 금융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생산성이 높지 않다는 뜻이다.
리스크를 짊어지길 꺼리는 금융회사들은 정부 지침에 의존하려고 한다. 정부가 세운 가이드라인에 따라 투자하는 게 뒤탈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생산적 금융은 무늬만 혁신 금융이지, 사실상 관치 금융 확장판이 될 수 있다.
생산적 금융은 민간이 주도하고 리스크를 짊어져야 맞다. 다만 관치에 익숙한 한국 금융 현실에서 하루아침에 자생적으로 선진국 수준의 생산적 금융이 이뤄지긴 어렵다. 그렇다면 정부부터 혁신적인 생산적 금융을 설계해야 한다. 그래야 민간 금융회사도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생산적 금융을 발굴하고 키울 수 있다.
당국이 금융사 관계자를 불러 수시로 여는 ‘생산적 금융으로의 대전환을 위한 회의’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 회의에서 금융사들은 정부에 생산적 금융 추진 계획을 제출하고 있다. 용어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정부가 중시하는 AI, 반도체 등 지원으로 요약된다. 물론 이런 분야에 자금 지원은 필요하다. 다만 민간의 창의성에 기반을 두지 않고 정부가 시켜서 하는 관치 생산성 금융에 다양성과 혁신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정부가 자칫 금융사들의 생산적 금융 집행 실적이나 수혜 기업 수에 집착하면 자금이 엉뚱한 기업들로 흐를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이러면 금융사는 실적 채우기에 급급해 쉽고 빨리 성과를 낼 기업을 찾느라 골몰하게 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투자자는 본보 취재팀에 “한국은 정부 지원 자금이 많아 좋은 면이 있지만, 가치가 부풀려진 기업으로 돈이 흐를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생산적 금융마저 관치가 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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