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유재동]‘최소 직원으로 최대 수익’ 잡포칼립스 시대

  • 동아일보

유재동 산업1부장
유재동 산업1부장
요즘 IT업계에선 한 실리콘밸리 기업인이 작성한 순위표가 화제가 되고 있다. 가장 적은 수의 직원으로 가장 많은 수익을 내는 기업들을 추려낸 표인데, 우리도 많이 쓰는 메시징 플랫폼 텔레그램이 1위에 올라 있다. 연간 10억 달러의 수익, 10억 명의 활성 사용자 수를 가진 이 기업의 본사 직원은 달랑 30명. 직원 1인당 수익을 단순 계산하면 3333만 달러(약 493억 원)에 달한다. 이 밖에도 생성형 인공지능(AI) 이미지 서비스 기업 미드저니, 데이터 레이블링(data labeling) 기업 서지AI 등 AI 기반 스타트업들이 죄다 순위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점점 거세지는 AI발 ‘감원 경쟁’

실제로 덩치를 줄이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린(lean) 경영’은 월가의 대세가 됐다. 예전 같으면 조용히 진행했을 직원 구조조정도 요즘에는 남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한다. 웰스파고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우리가 직원 수를 20개 분기 연속 줄였다”고 강조하면서 앞으로 더 많은 감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과거 인력 감축은 회사 경영의 위험신호로 해석됐지만 요즘은 반대로 기업이 얼마나 경영 효율화 의지가 있는지를 가리는 척도가 됐다. 실리콘밸리에선 이미 AI를 활용해 홀로 기업을 세워 운영하는 ‘솔로프러너(solopreneur)’가 적지 않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예언한 ‘1인 유니콘’ 시대가 어느새 현실로 성큼 다가섰다.

조직 슬림화는 기업들에는 실적 개선의 기회일 수 있지만, 반대로 구직자들에게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선 올해 ‘잡포칼립스(job+apocalypse·일자리 대재앙)’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AI가 저숙련 신입 일자리를 잠식하면서 대학 졸업자들이 첫 직장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기존 직원들의 입지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올 들어 11월까지 미국 기업들의 해고 발표는 117만 건으로 전년보다 54% 급증했다. 이들의 ‘감원 경쟁’은 아마존(1만4000명), UPS(4만8000명), 타깃(1800명) 등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AI가 기존 일자리를 없애는 대신 그만큼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너무 나이브하다. 대표적 AI 기반 시설인 데이터센터는 상주 인력이 수십 명 수준으로 투자액 대비 고용 창출 효과가 미미하다.

AI발 대량 해고는 한국도 남 얘기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현실이 됐다. 한국은 노동 유연성이 너무 낮고 해고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보니 기업들은 직원을 내보내기보다 신규 채용을 안 하는 방식으로 버티고 있다. 또 꼭 필요한 인재가 있으면 신입부터 뽑아 가르치기보다 ‘즉시 전력감’인 경력직을 선발하며 대응한다. 그러다 보니 피해는 청년들에게 집중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챗GPT가 출시된 2022년 이후 3년 동안 청년 고용이 21만 개 줄었는데 이 중 98.6%는 AI 노출도가 높은 산업에서 발생했다. 한 경제단체의 조사 결과를 보면 청년들은 올해 13번 이상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합격은 평균 2.6회에 그쳤다. 반복되는 실패에 무력감을 느끼고 구직을 단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자리 정책도 혁명적으로 바꿔야


AI 혁명과 그에 대응한 기업의 조직 슬림화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우리는 기업들에 채용을 강요하는 옛날 방식에 기댈 게 아니라, 반대로 이 전환기를 노동 개혁의 계기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키우는 연공서열식 호봉제를 뜯어고치고 기업들에 해고의 자유를 준다면 채용에 대한 부담이 줄어 전체 일자리가 더 늘어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아울러 혁명적인 규제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신기술 기업들도 쏟아져 나오게 해야 한다. 기술은 진보하는데 대응 방식이 이전 그대로라면 우리는 로봇과의 일자리 전쟁에서 패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리콘밸리#텔레그램#AI 스타트업#린 경영#감원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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