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은택]역대 최악의 임금체불, 나락에 떨어지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4일 23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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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지난해 9월 25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과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 기자실에서 입 모아 말했다. “임금체불 근절이야말로 노사법치 확립의 핵심이다.” 그로부터 네 달이 지났다. 상황은 좀 나아졌을까.

고용부 등에 따르면 한국의 지난해 임금체불액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봐도 소규모 금형·부품 공장이 밀집한 경기 부천시에선 지난해부터 임금체불 피해를 호소하는 근로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영세 사업장에서 50, 60대 여성들이 2∼6개월 치 임금을 못 받는 사례가 많다. 지역 노동상담가는 “하루 10건 정도 상담이 들어온다”고 했다.

피해자 대다수가 저소득 근로자인 임금체불은 일상생활의 토대를 단번에 무너뜨린다. 어느 날 갑자기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생활비를 빌려야 하고, 대출을 못 갚고, 아이들 학원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다. 말 그대로 근로자와 가족이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미국은 임금체불을 ‘임금 절도(Wage theft)’라고 표현한다. 미국 미네소타주가 상습 임금체불의 경우 최대 징역 20년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법적 처벌도 강한 편이다.

미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임금체불액 규모는 1억5615만 달러(약 2059억 원), 피해자는 13만5067명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한국의 임금체불액은 1조7000억 원 이상이며 피해자는 30만 명을 넘을 전망이다. 경제 규모(GDP·국내총생산)는 미국의 15분의 1인데 체불액은 8배가량이나 된다.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임금체불은 사법경찰 권한을 가진 근로감독관이 수사한다. 그런데 범죄로 보기보다 개인 채무 관계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한 노동상담가는 “사업주가 도망가 행방을 모르겠다고 사건을 종결하거나, 체불임금이 지급되지 않았는데도 ‘처벌불원서를 쓰고 사장과 합의하라’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임금체불은 반의사불벌죄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시민단체 참여연대는 2021년 보고서에서 “2007년 반의사불벌조항 도입 이후 체불이 증가했다”며 “근로감독관의 과도한 합의 종용을 줄일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임금체불은 최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재판까지 가는 경우가 드물고, 재판으로 가더라도 실제 처벌은 평균 200만 원가량의 벌금에 그친다. 못 받은 임금은 민사 소송을 내서 받아야 하는데 당장 내일 생계가 막막한 저임금 근로자들이 장기간 소송전에 매달리긴 쉽지 않다. 감독관은 수사 의지가 없고 벌금은 체불임금보다 훨씬 적으니 가해자는 도망가거나 버티는 게 이익인 구조다.

4개월 전 발언 때문에 제 발 저린 탓인지 고용부는 최근 “장관이 임금체불 근절에 나섰다”는 자료를 수시로 낸다. 지난해 1월에도 고용부는 “설 명절 대비 집중지도기간 운영으로 체불임금이 신속하게 해결됐다”며 자화자찬했다. 올해도 집중지도기간이 끝나면 비슷한 자료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는 동안 현장에선 임금체불로 나락에 빠지는 근로자들이 늘고 있다.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


#임금체불#한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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