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총선서 참패한 탁신 일가… 무상의료 등 내세워 2001년 집권
군부 쿠데타 주도로 2006년 실각… 매제-여동생-딸 통해 대리 통치
거듭된 실정에 지지층도 등돌려… 텃밭서도 외면당해 제3당 전락
전문가들 “탁신家 영향력 여전”… “포퓰리즘 한계도 뚜렷” 엇갈려
2023년 8월 해외 망명 15년 만에 귀국한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왼쪽)가 딸 패통탄과 수도 방콕 공항에서 지지층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탁신 전 총리, 패통탄, 탁신의 여동생 잉락, 탁신의 매제 솜차이 웡사왓 등 탁신 가문에서만 총 4명의 총리가 나왔다. 그러나 이들의 족벌 정치, 부정부패 등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8일 총선에서 탁신 일가가 이끄는 프아타이당은 원내 제3당으로 밀렸다. 방콕=AP 뉴시스
“탁신이 감옥 안에서 자신의 왕조가 저물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최근 미국 CNN방송이 21세기 태국 사회를 좌지우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탁신 친나왓(77) 전 태국 총리를 두고 내린 평가다. 8일(현지 시간) 태국 총선에서 탁신 일가가 세운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정당 프아타이당은 하원 전체 500석 중 불과 74석을 확보하며 참패했다.
특히 프아타이당은 탁신의 고향이며 그의 텃밭으로 꼽혔던 북부 치앙마이에서 단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왕실 지지 성향의 보수 정당 품짜이타이당이 193석으로 제1당 자리를 차지한 것과 대조적이다. 프아타이당은 강경진보 성향의 국민의당(118석)에도 크게 밀리며 원내 제3당으로 전락했다.
화교계 통신 재벌인 탁신은 2001년 2월 총리에 오른 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2006년 9월 그가 쿠데타로 실각했음에도 2008년 그의 매제 솜차이 웡사왓(79), 2011년 여동생 잉락 친나왓(59), 2024년 8월 딸 패통탄 친나왓(41)이 총리에 오르는 등 탁신 가문에서만 4명의 총리가 나왔다. 탁신은 가족의 집권 당시 막후에서 사실상 대리 통치를 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네 사람은 빈민층에 사실상의 무상 의료 제공, 쌀값 보조금 지급 등 노골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통한 성장, 즉 ‘탁시노믹스(Thaksinomics)’를 추구했다. 하지만 군부, 왕실 등과 내내 마찰을 빚었고 금권정치, 부정부패, 족벌정치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최근에는 핵심 지지층이던 농민, 대도시 서민 등에게서도 외면받는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8일 총선 참패로 약 사반세기 동안 지속됐던 탁신 일가의 영향력 또한 상당 부분 쇠퇴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탁신 전 총리는 누구이고, 그의 일가가 어떻게 태국 사회에 이토록 오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알아본다.
● 총리가 된 화교 통신 재벌
탁신 일가는 19세기 중국 광둥성에서 태국으로 이주한 화교 출신이며 비단 사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1949년 치앙마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탁신은 1973년 경찰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이스턴켄터키대, 텍사스주 휴스턴주립대에서 형사 행정으로 석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화교 상인의 후손답게 탁신은 귀국 후 경찰로 일하면서도 각종 부업에 열심이었다. 정보기술(IT) 산업의 초창기이던 1980년대 그는 컴퓨터, 케이블TV, 비퍼(삐삐) 등 각종 통신 사업을 벌였다. 1987년 아예 경찰을 관두고 본격적인 사업가로 나섰다. 탁신 일가가 소유한 ‘친그룹’은 이미 1990년대 초 태국 최대 통신회사로 성장했다.
사업에서 이룰 것을 다 이룬 탁신은 정치로 눈을 돌렸다. 1994∼1997년 외교장관, 부총리 등을 거친 그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경제난이 심각해지자 이를 정치적 기회로 삼았다. 그는 1998년 프아타이당의 전신 ‘타이락타이(태국인은 태국을 사랑한다)’당을 창당했다. 30밧(약 1380원) 의료제, 농가 부채 탕감 및 저금리 대출 확대, 마을당 100만 밧(약 4600만 원) 지원, 서민들의 유학 지원 등 파격적인 무상복지 정책을 내세웠다.
탁신의 집권 전 6500만 명 태국 국민 중 절대 다수는 의료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정치 또한 수도 방콕 거주자를 중심으로 군부, 경찰, 고위 관료 등이 주도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체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탁신이 처음으로 농촌과 서민층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자 저소득층이 열광했다.
2001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한 탁신은 한 달 후 총리에 취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런 그를 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보다 먼저 등장한 억만장자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원조 격”이라고 논평했다.
탁신은 경찰 간부의 딸 포자만 나폼베지라와 결혼해 패통태(47), 핀통타(44), 패통탄 1남 2녀를 뒀다. 이재(理財)에 밝은 포자만은 남편을 재벌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남편의 집권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한때 ‘태국의 힐러리 클린턴’으로 불렸다. 두 사람은 탁신의 실각 후 해외 도피 과정에서 이혼했다. 다만 재산을 지키기 위한 위장이혼이라는 설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 포퓰리즘-부패-연고주의 비판
탁신의 집권 기간 외환위기 후유증에 시달리던 태국 경제는 회복세로 돌아섰다. 당시 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4%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도 예정보다 2년 빠른 2003년 조기 상환했다.
이를 앞세워 탁신은 2005년 총선에서 하원 전체 500석의 75%인 377석을 쓸어 담는 대승을 거뒀다. 1932년 입헌군주제 수립 후 19번의 쿠데타가 발생할 정도로 정정 불안이 잦은 태국에서 4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총리, 선거라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재선에 성공한 총리 또한 탁신이 처음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탁신은 태국 사회의 금기로 여겨지는 공화제 도입을 주장하는 등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다.
동시에 그는 태국 사회를 깊이 분열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농민과 서민층은 그를 영웅 취급했지만 기득권 세력은 그의 포퓰리즘 정책, 부패, 친인척을 고위직에 중용하는 연고주의 등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탁신의 형제자매는 잉락, 솜차이 웡사왓의 부인 야오와파를 비롯해 8명에 달한다. 이들은 물론 포자만의 형제자매들까지 탁신의 집권 기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고위직에 오르자 비판이 고조됐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야당 정치인과 언론인을 탄압하는 통치 스타일도 문제를 키웠다.
2006년 1월 탁신 일가는 친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친코퍼레이션’의 지분 19억 달러(약 2조7550억 원)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에 매각했다.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음에도 친그룹이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해 단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민심이 등을 돌렸다.
결국 보수 세력과 군부가 반격에 나섰다. 2006년 9월 탁신이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에 머무는 사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선거법 위반 혐의를 이유로 타이락타이당의 해산을 명령했다.
쿠데타 후 해외를 떠돌던 탁신은 2008년 2월 잠시 귀국했다. 같은 해 8월 재판을 앞두고 다시 출국해 망명을 선언했다. 영국, 아랍에미리트(UAE), 홍콩, 싱가포르 등에 머물던 탁신은 2023년 8월 귀국했다. 귀국 직후 법원에서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8년 형을 선고받고 방콕의 한 교도소에 수감됐다.
하지만 그는 수감 당일 건강 이상을 이유로 경찰병원으로 이송됐다. 에어컨, 소파 등을 갖춘 VIP 병실에서 장기간 머물고 있는 데다 가석방과 재수감을 반복해 ‘무늬만 수감’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 잇따른 실정에 지지층 이탈
탁신의 뒤를 이은 태국 최초의 여성 총리 잉락, 태국 최연소 총리 패통탄 등도 여러 비판에 시달렸다. 2008년 프아타이당의 창당을 주도했고 2011년 8월 집권한 잉락 전 총리는 농촌 표심을 잡기 위해 농민들이 재배한 쌀을 시장가보다 훨씬 높은 값에 사들였다. 이런 쌀이 국제 시장에서 제값에 팔릴 리 없었고 천문학적인 재정 손실만 초래했다.
그 와중에 잉락이 오빠 탁신의 사면을 추진하려 하자 반정부 여론이 고조됐다. 2014년 5월 헌법재판소는 그를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해임했다.
잉락의 실각 후 2023년 5월 총선 전까지 9년간 군부가 지지하는 정당이 계속 집권했다. 이 기간 탁신 또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한 행보를 취했다. 그러나 총선에서 탁신 일가는 또 기회를 잡는다.
당시 총선에서는 현재 최대 15년 형인 왕실모독죄의 형량을 대폭 완화하고 왕실 자산을 투명화하며 동성혼을 허용하자는 등의 파격적인 진보정책을 내세운 강성진보 정당 ‘전진당’이 1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다만 과반을 차지하진 못해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가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탁신은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과 일가의 최대 반대파인 군부, 왕실 세력과 손잡고 연정을 구성한 것이다. 당시 탁신 일가는 자신들과 친밀한 기업가 출신 정치인 세타 타위신을 총리로 내세웠다. 2024년 8월에는 아예 패통탄이 직접 총리에 올랐다.
다만 군부 및 왕실 세력과 협력하면서 ‘기득권층과 맞서는 서민 영웅’이라는 탁신의 기존 이미지는 산산조각 났다. 기존의 기득권인 왕실, 군부와 대적하기 위해 신흥 기득권인 탁신이 금권 정치로 서민 표심을 파고들었을 뿐 탁신 일가 또한 기존 기득권과 큰 차이가 없다는 비판이 고조된 것이다.
지난해 5월 캄보디아와의 국경 분쟁 발발 후 패통탄 전 총리가 보여준 행보도 큰 비판을 받았다. 당시 그가 캄보디아 실권자 훈 센 전 총리와 나눈 통화 내용이 유출됐다. 이 통화에서 패통탄은 부친과 가까운 훈 센 전 총리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특히 자신에게 강경 대응을 촉구한 분씬 팟깡 태국군 제2사령관을 “단지 멋있게 보이려는 이유로 강경 대응을 고집한다”는 취지로 폄훼했다.
이 통화가 유출되자 태국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현직 총리가 분쟁 중인 이웃 나라와 일종의 내통에 나섰다는 인상이 짙어졌다. 결국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는 국가기밀 유출 혐의 등으로 패통탄을 파면했다.
● 조카 내세운 8일 총선서도 참패
이번 총선에서 프아타이당은 탁신의 조카 욧차난 웡사왓(47)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탁신의 또 다른 여동생 야오와파와 2008년 잠시 총리를 지낸 솜차이 웡사왓의 아들이다. 이미 총리를 네 명이나 배출한 탁신 일가가 친인척을 당의 얼굴로 내세운 것 또한 이번 총선의 패착으로 꼽힌다. 욧차난은 치앙마이 지역구에서조차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의학 분야의 과학자로 살았고 치앙마이와 큰 연고도 없다.
뉴욕타임스(NYT)는 “탁신은 태국 사회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젊은 층은 탁신과 그의 포퓰리즘 정책에 아무런 애착이 없다”고 꼬집었다. 과거 탁신 지지자였던 시민 피팟 새티아우 씨(72) 또한 AFP통신에 “탁신이 도입한 30밧 의료제를 지지하지만 자식은 물론 조카까지 정치에 끌어들인 데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과거 프아타이당이 차지했던 ‘서민의 정당’ 이미지도 다른 세력이 차지했다. 2024년 헌법재판소가 전진당을 해산하자 그 지도부는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국민의당은 노인 연금 및 장애 수당 인상, 최저임금 인상 등 탁신 일가와는 또 다른 복지 정책을 강조하며 탁신 일가의 전통적 지지층이던 대도시 서민을 공략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성장 둔화와 양극화 상황에서 국민의당이 프아타이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을 잠식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탁신 본인의 위기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귀국 후 병원에서 보낸 6개월이 형기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결정으로 지난해 9월 1년 실형을 선고받고 재수감됐다. 그의 왕실모독 혐의 재판 또한 끝나지 않았다. 탁신은 재판 출석 때 종종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나오는 등 왕실 측에 납작 몸을 엎드리고 있다.
● “탁신 영향력 지속” vs “포퓰리즘 한계 뚜렷”
이번 총선 결과로 탁신 일가의 영향력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 있느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태국 전문가인 박정훈 부산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는 “치앙마이 등 북부 농민 유권자에게는 여전히 ‘탁신 브랜드’의 영향력이 강하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ISEAS-유소프이삭연구소의 폴 챔버스 선임 연구위원 또한 AFP통신에 “태국 정치에서 ‘끝’이란 없다. 경제가 계속 나빠지면 프아타이당에 다시 기회가 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총선에서 품짜이타이당의 승리를 이끈 아누틴 찬위라꾼 총리는 1996년 탁신이 만든 타이락타이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인물이다. 아누틴 총리를 포함한 품짜이타이당의 지도부 또한 한때 타이락타이당에 몸담았지만 탁신의 지나친 포퓰리즘, 반왕실 노선에 불만을 품고 분당을 택한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아누틴 총리는 14일 연정 구성 시 프아타이당과도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현재 수감 중인 탁신은 1년 형기의 3분의 2, 즉 8개월을 복역하면 가석방 신청 조건을 충족한다. 빠르면 오는 5월 가석방될 수 있다. 태국 쭐랄롱꼰대의 티티난 퐁수디락 교수는 CNN에 “탁신은 자존심이 강한 ‘뉴스메이커(newsmaker)’이자 ‘협상가(dealmaker)’”라며 “예전만큼 강력하고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탁신 일가는 계속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다만 박 교수는 “포퓰리즘은 더 큰 포퓰리즘을 요구한다. 포퓰리즘에 따른 정치적 효능감은 갈수록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탁신 일가의 재집권 여부와 관계없이 탁시노믹스 자체는 한계에 직면했다는 취지다.
탁신의 집권 시절 5%대 성장을 구가했던 태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2019년 이후 단 한 번도 3%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2025년 성장률 또한 2.2%에 그친 것으로 추산된다. IMF 기준 2024년 가계 부채도 GDP의 89%에 달해 서민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결국 성장 둔화, 양극화라는 고질적 문제를 누가 해결하느냐가 향후 태국 정계의 주축 세력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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