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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101번째 경우의 수[이정향의 오후 3시]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 2022-08-17 03:00업데이트 2022-08-17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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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벤트 하머 ‘오슬로의 이상한 밤’
이정향 영화감독
67세의 철도 기관사 오드 호르텐은 평생 일탈이라고는 모른 채 묵묵히 철로 위만 달렸다.

독신이기에 매일 아침 손수 도시락을 만들고, 직접 다림질한 제복을 입고서 출근길에 나선다. 이렇게 40여 년간 반듯하게 정해진 선로 위만 달린 그가 내일이면 정년퇴임을 맞는다. 동료들이 퇴임 파티를 열어준 날 밤, 그는 평생 한 번도 겪지 못한 일들을 연쇄적으로 겪는다. 담배를 사느라 동료들보다 한발 늦은 게 기이한 일들의 시작이었다. 파티장을 찾다가 낯선 집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마지막 운행에 지각까지 한다. 그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호르텐의 어머니는 스키 점프 선수였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뜻을 펼치지 못했다. 아들 호르텐은 겁이 많아 친구들이 다 하던 스키 점프를 끝내 하지 못해 어머니를 실망시켰다. 소심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그에게는 매일 정해진 선로 위만 달리는 기관사가 천직인 셈이다.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각을 한 후로 심한 자괴감에 빠진 그는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일탈에 몸을 맡긴다. 아니, 주변 상황이 그의 의지와 자꾸 어긋난다. 하지만 그도 궤도 수정을 하는 대신 새로운 궤도에 몸을 맡긴다. 그러다 보니 급기야는 길거리에 쓰러진 괴짜 남자에게 말을 걸게 되고,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공교롭게도 그 괴짜가 그날 세상을 뜬다. 호르텐은 괴짜가 유품으로 남긴 스키를 타고 생애 처음으로 공중 점프를 시도한다.

67세에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자세를 갖춘 호르텐. 그에게 남겨진 날들은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겠지만, 충만함과 밀도는 몇 갑절 이상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기도한다. 오늘도 별일 없이 평탄하기를. 하지만 평탄한 나날의 연속 속에서 무엇을 배울까? 어떤 성취감을 느낄까? 우리는 근심에 찰수록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리며 대책을 세운다. 하지만 신은 우리가 준비한 100가지 경우의 수를 가볍게 따돌리고 101번째의 수를 던져줄 때가 많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지만 그 101번째의 궤도에 두둥실 나를 실어볼 때 의외로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꼭 먹고 싶던 식당이 하필 임시휴업일 때, 오늘 일진이 사납다고 자조하며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식당이 평생의 맛집이 되기도 한다. 친구 대신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평생의 짝을 만나기도 하고, 매진이라 시간이 맞는 아무 영화나 봤는데 인생의 진로를 바꿀 만큼 강렬한 메시지를 얻는다.

호르텐이 모는 오슬로-베르겐행 기차는 6시간 여정으로 노르웨이 관광객들이 제일 많이 찾는 노선이다. 설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무더운 여름 밤, 오슬로의 이상한 밤이 위로가 된다.


이정향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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