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함의 위력[이정향의 오후 3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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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롭 라이너 ‘플립’

이정향 영화감독
이정향 영화감독
1957년. 미국 미시간주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 줄리는 앞집에 이사 온 동갑내기 브라이스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 후 줄리는 줄기차게 브라이스를 좋아하지만 정작 그는 자기를 쫓아다니는 줄리가 귀찮기만 해 줄곧 무시한다. 줄리는 아름드리나무에 올라 노을 진 마을 풍경을 보길 좋아한다. 그녀의 아빠가 말했다. 부분과 부분이 모이면 굉장한 뭔가를 이룬다고. 바람, 햇살, 구름이 협력하여 멋진 일몰을 선사하는 걸 보며 줄리는 깨닫는다. 부분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함을. 여태 한 번이라도 자기를 이해하기는커녕 실망만 주던 브라이스에 대해 ‘나는 그의 멋진 눈과 미소만 좋아한 건 아닐까?’라며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브라이스의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줄리의 매력을 알아봤다. 그녀에게 조언하기를, 어떤 사람은 부분을 합친 것보다 전체가 못날 수도 있단다. 줄리는 브라이스가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6년 만에 해본다.

우리 집엔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 10년을 더 쓰고 있는 명줄 긴 프라이팬이 있다. 이번 한 번만 더 쓰고 버린대놓고 울 엄마는 기름 두를 일이 생기면 아직도 그 프라이팬부터 찾는다. 새 프라이팬은 흠집 안 나게 조심해야 하고, 거친 수세미로 씻어도 안 되니 언제나 오늘 하루만 더 쓰고 버릴 프라이팬이 만만하다. 일일 연속극 두 편이 내리 방영되는 저녁 시간대에 엄마에게 말을 걸면 짜증을 낸다. 그런데 내 눈엔 두 편이 비슷해서 볼 때마다 헷갈린다. “저 며느리가 아들을 버리고 재혼한 거지?” “그건 8시 반 드라마!” “저 꼬마가 친아들이지?” “그건 8시 거고, 쟤는 조카잖아!” 엄마는 두 편 다 빤한 내용이라고 흉보면서도 그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TV 앞에 정좌한다. 만만함의 위력이다.

만만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대상들은 돋보이는 부분은 없으나 전체적인 합이 뛰어난 존재들일 수 있다. 성급하게 부분만 보고 판단하느라 전체를 보지 못해 평가절하당하는 건 아닐지. 우리가 무시하면서도 옆에 가까이 둔다는 건 분명 가치가 있다는 증거니까. 이런 만만한 것들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 줄리가 더 이상 자기를 쫓아다니지 않자 브라이스는 무시했던 줄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줄리는 브라이스의 얼굴만 보고 성급하게 사랑에 빠졌다가 그의 소심한 성격을 깨닫고 콩깍지가 한 겹 벗겨졌지만, 브라이스는 줄리의 극성스러운 부분만 보고 싫어했다가 또래 여자애들과는 다른 그녀의 인간미를 알고 뒤늦게 사랑에 빠진다. 제목 ‘플립(flipped)’은 뒤집힌다는 뜻이다. 평범하고 익숙한 것의 진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부분만을 보는 시선을 뒤집지 않는다면.

이정향 영화감독
#만만함#위력#롭 라이너#플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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