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콤플렉스 벗고 한반도 노린 日, ‘삼국 간섭’에 제동[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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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한반도 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지만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제동이
 걸린다. 중국 산둥성 류궁다오 ‘갑오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한 모습. 동아일보DB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한반도 진출의 기틀을 마련하지만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제동이 걸린다. 중국 산둥성 류궁다오 ‘갑오전쟁박물관’에 전시된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장면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한 모습. 동아일보DB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년 동안 연재해온 ‘한일 역사의 갈림길’이란 제목의 연재를 마치고 오늘부터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란 연재를 새로 시작한다. 20세기 일본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는,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근현대 한국은 그것에 배우고 저항하며, 그것에 당하고 이겨내며 만들어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일본사는 낯선 대상이다. 밉고 불쾌해서 공부를 회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진국이 된 마당에 한국 시민도 20세기 일본을 냉정하게 직시해 볼 때가 되었다.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 시민의 시각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어디까지 성숙했는가를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20세기 일본사 연재는 한국 신문상 최초의 시도일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을 바란다.》

문명 실어나른 대한해협

오늘은 첫 회니 일본사의 전반적인 배경과 20세기 전야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자. 일본과 중국 대륙의 관계를, 영국과 유럽 대륙 관계와 비교하는 주장이 있다. 사뭇 다르다.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해협은 33.3km에 불과한 데 비해 중국 서남해안과 나가사키 사이에는 광활한 동중국해가 가로놓여 있다. 게다가 동중국해는 파도가 거칠어 왕래가 매우 힘들었다. 일본은 겨우 7세기, 8세기나 되어서야 수나라, 당나라에 대규모 사신(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을 파견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 중국 대륙과의 거리야말로 일본사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틀 지은 제1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것만이었다면 일본은 낙후된 거대한 섬으로 남았을 거다. 그러나 동중국해는 광활했지만, 대한해협은 좁았다.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는 200km 정도인데 중간에 쓰시마라는 큰 섬이 있었다. 게다가 온화한 바다였다. 한반도가 정력적으로 흡수·소화한 중국 문명은 쉽사리 현해탄을 건넜다. 넓은 동중국해는 중국의 침략을 막아주었고, 좁은 대한해협은 중국·조선의 문명을 날라다 줬다.

한반도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일본사에 중요했다. 그것은 일본 열도가 한국사에서 갖는 의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했다. 하나는 방금 말한 문명의 젖줄이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대륙발 침략전쟁의 방파제 역할이다. 만리장성이 상징하듯, 한 무제-흉노에서 명-청 전쟁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대륙에서는 오랫동안 중국과 유목세력이 충돌했다. 그 여파는 늘 한반도에 밀려와 전쟁이 발발했다. 그런데 그 전쟁은 모두 현해탄을 건너지 못했고, 일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예외는 13세기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한 일이다.

자급자족과 고립 택한 日


이처럼 일본은 중국 대륙과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그 문물은 한반도를 통해 ‘안전하지만 큰 시차를 두고’ 흡수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일본에는 수준 높지만 고립적이면서도 특수성이 강한 문명이 성장했다. 면적은 19세기 중엽 편입된 홋카이도를 빼도 한반도나 영국보다 훨씬 넓었고, 토양이나 기후도 매우 좋아 농업생산력이 높았다. 나라의 규모나 생산력이 고립적으로 살아가도 별 문제가 없었다. 임진왜란 후 성립한 도쿠가와 시대는 특히 그랬다. 이 시대 일본의 국가전략은 자급자족과 고립이었다.

18세기까지는 비단, 도자기, 차 등 중국·조선에서 수입하던 상품들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유명한 쓰시마의 왜관무역도 비중이 날로 줄어들었다. 또 도쿠가와 시대 250년 동안 일본은 서울이나 베이징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적이 없다. 사절은커녕 부산 왜관을 제외하고 일본인은 열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명한 쇄국정책이다. 남서쪽 유구 왕국(현 오키나와)은 규슈 남부의 사쓰마번(薩摩藩)을 통해 간접 지배했고, 더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직전 유구의 직접지배를 주장하는 논자들이 나타났으나 막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방에는 광활한 에조지(蝦t地·현 홋카이도)가 있었다. 여기서도 남단 하코다테에 마쓰마에번(松前藩)을 두었을 뿐, 더 이상의 북진은 시도하지 않았다.

메이지유신 이후 노선 전환


일본이 청에 할양받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한다는 내용이 담긴 회담록.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이 청에 할양받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한다는 내용이 담긴 회담록.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고 보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국가 전략은 180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부국강병 노선은 도쿠가와 시대에도 있었으나 근대일본은 이를 해외에서 추구했다. 쇄국은 별안간 해외 ‘웅비(雄飛)’로 전환했다. 물론 급격한 노선전환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유신(1868년)부터 청일전쟁(1894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웅비론’의 가부를 두고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대 만 침략(1874년), 운요호사건(1875년), 갑신정변(1884년)은 그 과정에서 수면 위로 삐죽 나온 포말(泡沫)이었다. 청일전쟁 발발은 ‘웅비론’ 측이 마침내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일본에 너무도 달콤했다. 대청제국을 무찔렀다는 사실은 ‘중국 콤플렉스’가 있던 일본인들을 열광시켰다. 비교적 짧은 전쟁 기간, 적은 전사자로 대만, 랴오둥반도, 막대한 배상금 등 전리품도 두둑이 챙겼다. 무엇보다 청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숙원사업을 달성했다.

조선을 사이에 두고 힘을 겨루는 일본과 러시아를 풍자한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선을 사이에 두고 힘을 겨루는 일본과 러시아를 풍자한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기쁨도 잠시,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랴오둥반도의 반환을 요구해 온 것이다. 청과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러시아와 독일 함대는 산둥반도로 모여들었다. 한국에서는 갑오개혁정부·일본에 밀려나 있던 고종·민비가 권토중래를 꾀했다. 당황한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은 민비 시해라는 참극을 벌였고,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했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에 굴복했다.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었고 한반도에서도 발을 뺐다. 일본 열도는 분노로 들끓었다. 러시아에 굴복한 정부를 비굴한 외교라며 몰아세웠다. 러시아와의 개전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폭주했다. 정치가들과 언론인들은 대외강경론이 인기를 끄는 시대가 되었음을 잽싸게 알아챘다. 그러나 영국과 함께 당시 주요 2개국 (G2)이었던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일본 정부는 국민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호소했다. 이 말은 삽시간에 국민표어가 되었다. 이때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던, 훗날의 유명한 인물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한결같이 ‘와신상담’이란 말을 기억했다. 선생님이 교단에 서더니 칠판에 크게 ‘와신상담’이란 말을 쓰고서는 한참을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더라는…. 일본의 20세기는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근현대 한국#일본사#메이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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