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외교의 중요성, 120년 전 ‘英日동맹’에서 본다[박훈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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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영일동맹 체결 후 일본의 한 백화점에서 제작한 기념엽서(위쪽 사진). 강대국 영국과 동맹을 맺자 일본에서는 자축 분위기가 컸고, 이런 자신감은 러시아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이어진다. 1902년 1월 30일 체결된 영일동맹 문서. 사진 출처 나무위키·위키피디아
1902년 영일동맹 체결 후 일본의 한 백화점에서 제작한 기념엽서(위쪽 사진). 강대국 영국과 동맹을 맺자 일본에서는 자축 분위기가 컸고, 이런 자신감은 러시아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이어진다. 1902년 1월 30일 체결된 영일동맹 문서. 사진 출처 나무위키·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899년 겨울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발했다. 5년 전 ‘동학란’이 청일전쟁을 불러온 것처럼, 이 민중운동은 러일전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러시아 군대는 난을 진압하고 나서도 만주에 머물렀다. 10만 대군이었다. 일본과 서구 열강은 철수를 요구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의견이 갈려 갈팡질팡했고, 1903년의 철수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 삼국간섭 이래 ‘와신상담’하며 러시아를 노려보던 일본은 ‘어라, 이거 뭐지?’ 했고, 대한제국은 두 나라가 충돌할까 봐 좌불안석이었다.》

청나라인 수천 명 흑룡강 수장

1900년 흑룡강(아무르강)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군과 청군 사이에 작은 충돌이 벌어지자, 러시아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청나라 민간인 3000명(5000명 혹은 그 이상이라는 설도 있음)을 학살하고 흑룡강에 수장시켜 버린 것이다. 이를 구실로 일본인들은 ‘아무르강의 유혈이여’, ‘우랄의 저편’ 같은 노래를 부르며 반러감정을 선동했다. “서기 1900년, 한없이 긴 아무르여. 러시아인의 횡포에 청나라 백성, 죄 없이 죽은 수 5000명 (중략) 아아, 잔학한 야만족에게 원한을 갚을 때가 되어 (중략) 금빛의 백성이 드디어, 드디어 야마토 민족이 싸울 때가 되었네, 싸울 때가 되었네.”(야마무로 신이치 ‘러일전쟁의 세기’) ‘금빛(황인종)’의 청나라 사람에 대해 동정을 보이며, 같은 금빛의 야마토(일본)가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인종론으로 전쟁을 선동하고 있다.

백인종의 침탈에 맞서 황인종을 지킨다는 일본의 전쟁논리는 그 후 변화해간다. 러시아와 전쟁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미국 정계의 지지를 얻어야 했고, 런던과 뉴욕 공채시장에서 돈을 조달해야 했다. 인종전쟁론은 방해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의전(義戰)’으로 프레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 인종전쟁론의 설득력은 강력했고,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한국 독립의 약속을 깰 때까지는 한국에서도 그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외교 참패 韓, 성과 거둔 日


20세기 들어 일본 국내 정치도 크게 변화했다. 1900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정우회라는 정당을 스스로 만들어 네 번째로 총리가 되었지만 7개월도 안 돼 물러났다. 이토의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 뒤를 육군대장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이어받았고 외무대신에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임명되었다. 이들 모두 메이지유신의 원로가 아닌 사람들이다. 원로들은 대외강경책에는 대체로 신중했다. 그러나 세대교체가 된 새 내각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을 보호국화하려 했고 방해가 된다면 러시아와도 일전을 불사할 태세였다. 원로 중 강경파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조차도 이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라고 일갈했다. 러시아가 만주에서 미적대는 것은 이들의 강경책을 부추겼다.

러시아 전함 ‘팔라다’(왼쪽)와 ‘포베다’. 러시아는 일본에 한반도 북위 39도 이북 지역의 중립화, 러시아함대의 자유로운 대한해협 항해 등을 요구했지만 이견을 보였고 결국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러시아 전함 ‘팔라다’(왼쪽)와 ‘포베다’. 러시아는 일본에 한반도 북위 39도 이북 지역의 중립화, 러시아함대의 자유로운 대한해협 항해 등을 요구했지만 이견을 보였고 결국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러시아와 일본이 한판 붙으면 위험해지는 건 대한제국이었다. 고종은 외교라인을 가동했다. 1900년 방곡령으로 유명한 조병식을 주일공사로 파견해, 일본 정계에 한국의 중립화를 설득했다. 일본은 냉담했다. 고무라 외무대신도, 재야의 거물 고노에 아쓰마로(近衛篤마)도 중립국은 자신을 지킬 정도의 힘은 있어야 되는 거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 대신 한일동맹을 제안했다. 러일전쟁이 나면 중립국 말고 일본 편이 되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고종이 전시중립을 선포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에 협력하도록 강제했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한일의정서(1904년)다.

한국의 외교가 처참하게 실패하는 동안, 일본 외교는 미증유의 성공을 거뒀다. 영일동맹의 체결이다(1902년). 영국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남하하는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여왔다. 한국에 관심은 없었으나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은 좌시할 수 없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일동맹을 생각해냈고 일본 정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반대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러시아를 방문해 협상하고 있었다. 결국 협상 타결에 실패해 영일동맹 체결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위협이 된 영일동맹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이 극동의 신흥국에 불과한 일본과 동맹을 맺자, 일본인들은 좋아 어쩔 줄 몰랐다. 당시 런던 유학 중이던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마치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과 인연을 맺어 기쁜 나머지, 종과 큰 북을 두드리면서 마을을 뛰어다니는 것” 같다며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영일동맹하에서 세계 최강국 영국은 한국의 보호국화에도 고종 폐위에도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한국이 합병되어도 영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서둘러 정동의 공사관을 떠났다. 강대국에 대한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영일동맹과 1953년 한미동맹은 생생히 보여준다.

영일동맹은 러시아에 위협이었다. 일본도 러시아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양측의 요구는 좁혀지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우월적인 지위를 인정해주면,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권리를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만주는 일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협상의제를 한국 문제로만 하려는 생각이었다. 러시아는 한반도 북위 39도 이북을 중립화할 것,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을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을 것 등을 요구했다. 이때 이미 한반도를 반으로 나누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국을 교환(만한교환론)하려던 일본의 의도는 무산됐다(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사이 민간에서는 주전론이 비등했다. 전쟁을 말려야 할 언론인, 학자들이 부추겼다. 뭐에 홀렸던 것일까. 일본 젊은이만 20만 명을 희생시킨 이 전쟁을 꼭 해야 할 이유란 무엇이었던가? 한국을 장악하지 못하면 일본의 방위는 정말 위태로웠을까? 시베리아철도도 동청(東淸)철도도 아직 개통되지 않은 마당에 러시아가 정말 한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었을까? 흑룡강에서 죽어간 청나라 사람들을 애도하던 그 마음으로 요동반도 반환을 받아들이고, 일본열도 전수방위(專守防衛)를 전략으로 삼을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아군에 총질하는 자’로 재갈이 물려졌다. 사상과 언론의 세계에서 ‘아군에 총질하는 자’는 언제나 필요한 존재들이며, 이들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야말로 이적행위다. 애국의 이름으로 진짜 이적행위를 하는 자들이 횡행하는 가운데, 마침내 일본 해군은 러시아를 선제공격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강대국 외교의 중요성#러일전쟁#英日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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