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선미]IMF 아빠, 코로나 엄마

김선미 논설위원 입력 2021-04-24 03:00수정 2021-04-24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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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였던 1990년대 후반, 서울역 화장실에 ‘피 팝니다’란 문구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살벌하고도 슬픈 광경이었다. 정리해고 칼바람에 남성들이 줄줄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평범한 가장이 매혈(賣血)을 할 만큼 절박했다.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도 직장을 잃은 ‘IMF 아빠’들의 공감 속에 ‘아버지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코로나19 팬데믹도 우리 사회 가장들을 피눈물 흘리게 했다.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거나 거리 두기로 자영업 장사가 힘들어지면서 날벼락처럼 가계수입이 줄었다. 밤늦게까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쓰러지거나 병을 얻은 남성들이 많다. 그런데 코로나는 ‘코로나 엄마’도 낳았다. 여성 종사 비중이 높은 교육 서비스업, 숙박과 음식점업 등이 코로나 직격탄을 맞으면서 여성들이 대거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호텔의 침구관리, 항공기 기내 청소 등 일상의 보이지 않는 곳을 뒷받침해주던 일자리가 무너졌다. 사실 이 일자리는 IMF가 만든 눈물의 일자리였다. IMF 아빠들이 제조업이나 금융업 등에서 실직하자 집에 있던 여성들이 싼값의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당시 때밀이 학원에서 세신(洗身) 기술을 배우던 IMF 아빠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남편들이 뭐라도 기술을 배워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할 때 아내들은 그들이 집에서 하던 돌봄의 일을 사회에서 찾았다.

▷코로나가 안타까운 건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39∼44세 기혼 여성이 일자리를 스스로 관두고 ‘경단녀’가 된 것이다. 학교가 문을 닫아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IMF 아빠와 코로나 엄마는 닮은 듯 다르다. 똑같이 직장을 잃었어도 코로나 엄마는 사회적으로 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잘못된 사고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도 ‘집에서 애 보면 된다’고 여기는 시선이 있다. 돌봄 노동을 남에게 맡기려면 “그 돈만큼 벌지 못하면 뭐 하러 나가 일하느냐”는 말도 듣는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적은 인구수축사회는 미래의 재앙이란 걸 모르고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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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과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여성은 일터에서 차별을 겪고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한다고 썼다.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게 곧 권력이다. 위태로운 일자리의 여성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엄마가 새로운 유망산업으로 옮겨 적응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 경제가 IMF 아빠의 슬픔을 딛고 위기를 극복해냈듯 코로나 엄마의 재취업을 늘려야만 코로나 이후의 도약을 준비할 수 있다.

김선미 논설위원 kimsunmi@donga.com
#imf#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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