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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쿠팡은 美기업’ 인식에 발목 잡힌 벤처생태계[현장에서/사지원]

입력 2021-02-18 03:00업데이트 2021-02-18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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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을 추진하는 쿠팡의 서울 송파구 본사. 뉴스1
사지원 산업2부 기자
“미국 기업이 미국에 상장한 것이죠.” 권칠승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16일 벤처기업 관련 브리핑에서 쿠팡의 미국 상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국내 대표 이커머스 기업인 쿠팡이 1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계획을 밝힌 직후다. 쿠팡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뉴욕 증시에 상장하는 것에 국내 경제계가 환호한 것과는 온도가 사뭇 다르다.

권 장관의 ‘미국 기업’ 발언은 토종 기업들이 한국에서 시작해서 외국에 나가는 경우와 쿠팡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물론 그의 말대로 이번에 뉴욕 증시에 상장하는 ‘쿠팡LLC’는 미국 법인이다. 회사도 미국 델라웨어주에 있다. 이 법인은 쿠팡의 지분 100%를 갖고 있다. 쿠팡의 창업자 김범석 이사회 의장은 이민 1.5세로 미국 국적이다. 12명으로 구성된 쿠팡LLC의 이사회도 김 의장을 비롯해 우버 시스템을 만든 투언 팜 최고기술책임자(CTO), 아마존 출신 고라브 아난드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대부분이 미국인이다.

법인의 소재지와 지분 구조만 보면 쿠팡이 미국 기업이라는 설명은 틀린 건 아니다. 그럼에도 쿠팡의 산업 기반이 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미국 기업과 동일시하기도 어렵다. 뉴욕 증시 상장에 도전할 수 있는 것도 ‘로켓 배송’ 등 한국에서 벌이는 비즈니스 모델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소비자와 직원도 한국인이다. 쿠팡은 지난해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엮여 비판받았을 때도 “쿠팡은 한국에서 설립돼 성장했고 사업의 99% 이상을 한국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굳이 ‘미국 기업’이라고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을까.

권 장관의 발언은 쿠팡의 미국 상장을 ‘한국 패싱’으로 보는 비판에 대한 방어로 보인다. 야권을 중심으로 “한국에 차등의결권이 없어서 한국이 쿠팡을 놓쳐버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15일 “쿠팡이 한국 증시에 상장하면 경영권 탈취 위협이 있어 한국 증시를 버리고 미국 증시에 상장했다”고 했다. 권 장관이 이런 비판에 대응하면서 쿠팡 상장 이슈가 소모적 공방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국적보다 중요한 건 기업의 성장 그 자체다. 지금 우리의 벤처생태계에서 쿠팡 같은 유니콘 기업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차정훈 중기부 창업벤처혁신실장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비즈니스 모델이 글로벌에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기업은 국적이 무의미해진 열린 시장에서 뛰고 있는데 정부만 닫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제2, 제3의 쿠팡을 만들려면 기업의 국적을 따질 게 아니라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기업의 국적을 따지는 인식으로는 벤처가 뛰어다닐 넓은 운동장을 만들기 어렵다.

사지원 산업2부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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