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법[횡설수설/김영식]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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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백악관 비밀경호국(SS) 요원 케리 오그레이디는 2016년 대선 직전 소셜미디어에 “나라와 여성 및 소수자에게 재앙이 될 후보를 위해 총탄을 막느니 차라리 감옥을 택하겠다”고 썼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를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 스스로 “23년간 해치법을 위반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세상이 변했다”고 썼듯이 그는 해치법 위반으로 파면당했다.

▷해치법(Hatch Act)은 미국 공무원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는 법으로 1939년 제정됐다. 전년도 의회 선거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뉴딜 정책에 따라 비숙련 지원자를 동원해 공공사업을 벌이던 일자리개선청에 취업시켜 주겠다며 유권자를 매수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입법을 주도한 칼 해치 상원의원의 이름을 딴 해치법은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강제할 뿐 아니라 공직과 정치를 분리하는 근거로 역할한다.

▷어제 끝난 미 공화당 전당대회를 계기로 해치법 논란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 수락연설을 백악관 정원에서 한 데다 현직 국무장관 등을 연사로 동원한 것이 해치법 위반 논란을 불러왔다. 그래도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상회담 등 국제행사를 자신 소유 리조트에서 열고 정부에 비용을 청구하는 식으로 사적 이익을 챙기는 트럼프에겐 백악관 앞뜰 행사쯤이야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는 선거 때마다 에어포스원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유세에 나선다. 해치법이 대통령과 부통령을 예외로 규정한 덕분에 법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역대 어느 대통령도 트럼프처럼 노골적으로 대통령의 특권을 정치적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로 남용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해치법은 그 존재 자체로 미국 공무원이 자신의 업무에 전념하게 해주는 방패막이로 작용한다. 미국은 해치법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연방 감시기구인 특별조사국(OSC)을 통해 공무원이 지위를 악용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지 감시한다. 정치적 목적에 따른 부당한 지시를 받은 공무원이 OSC에 신고할 수도 있다. 세계 최강대국을 이끌어 나가는 힘의 바탕이 소신을 가진 공무원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공무원은 국가공무원법 공직선거법 등에 따라 미국 못잖게 엄격한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지닌다. 그런데 최근 일부 국무위원들은 경쟁하듯 정치적 당파적 발언을 남발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의 정치 본능이 강해질수록 직업공무원은 위축된다. 그 결과는 공직과 정치 행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 장관의 입맛에 알아서 맞추는 엉성한 정책의 남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엄격한 해치법 정신이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할 시점이다.
 
김영식 논설위원 spear@donga.com
#해치법#미 공화당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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