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해남, 포작인[김창일의 갯마을 탐구]〈47〉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입력 2020-07-10 03:00수정 2020-07-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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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다. 현재의 생활상을 기록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을 적는 행위가 아니라 사실과 사실을 엮어서 만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주민들과 함께 사계절을 보내며 울산의 어촌을 조사할 때다. 해녀 물질이 끝날 즈음이면 필자는 바다를 주시했다. 해녀들이 뭍에 닿기 전에 기다렸다가 해산물이 든 망사리를 육지로 올리는 일을 도왔다. 이를 매일같이 반복하면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 청년이 된다. 카메라와 수첩만 들고 다니는 외지인이 아닌 마을 주민으로 인식하면 먼저 다가와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여느 때처럼 바닷가에서 해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질을 마친 할머니 해녀들이 유난히 지쳐 보여 윗옷을 벗어 던져두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물로 들어가서 모든 해녀의 망사리를 뭍으로 끌어올렸다. 육지로 올라온 해녀 할머니들이 필자를 향해 한마디씩 했다. 서울 올라가지 말고, ‘해남(海男·물질하는 남자)’ 하면서 마을에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우스갯말에 함께 웃었다. 이후 의문이 생겼다. 남성이 물질을 하면 더 많은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을 텐데 해녀사회는 왜 여성으로만 이뤄졌을까.

자료조사를 하던 중 울산에 ‘두무악(豆無岳)’이라는 제주민이 마을을 형성했고, 전복을 잡아서 진상한 기록을 확인했다. 울산 읍지인 학성지(鶴城誌·1749년)에 “제주 한라산을 두무악이라 하는데 근본을 잊지 않아서 이와 같이 되었다”고 했다. 울산에 거주한 두무악은 17, 18세기에 180호 이상을 유지했다. 이들은 제주 포작인(鮑作人)으로 고역을 견디다 못해 도망 나온 유민들이다. 제주도에서 포작인은 전복을 잡아서 진상하는 일 외에도 진상선(進上船)이나 전선(戰船)의 사공으로 차출되어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채취한 해산물을 진상하고, 진상선의 노를 젓고, 왜구를 방어하는 역할까지 했다. 과도한 역(役)으로 여자들이 혼인을 꺼려서 평생을 홀아비로 지내기 일쑤였다. 김상헌은 남사록(南사錄)에서 “진상하는 전복의 수가 매우 많고 관리들은 공(公)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는 것이 몇 곱이 되어 포작의 무리들은 견디지 못하여 도망가고, 익사하여 열에 두셋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거둬들이는 세금은 줄지 않으니, 이웃에 홀어미가 있다 하더라도 차라리 빌어먹다가 죽을지언정 포작인의 아내가 되려 하지 아니한다”라고 했다. 경상·전남 해안가로 탈주하거나 섬을 유랑한 포작인이 늘어난 이유다.


포작인의 배는 가볍고 빨랐으며, 단련된 몸과 사나운 기질을 가져 왜구들도 피해갈 정도였다. 누구보다 바다를 잘 알기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던 수군에 동원되었다. 해안 지형과 물길에 해박했기에 수군의 도선사로서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점을 왜인들도 이용했다. 포작인을 우대해 주고 해적질할 때 안내인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 고토(五島)에 표류했다가 왜구의 앞잡이가 된 사화동(沙火同)이다. 왜군이 여수 손죽도 해상을 침입한 정해왜변(1587년) 때 사화동이 길 안내 노릇을 했다. 포작인은 바다를 잘 알기에 수군으로 큰 활약을 했고, 일부는 과도한 공납과 부역에 반감을 품고 왜구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다. 통제와 수탈을 피해 유랑했던 그들의 삶의 모습은 기록되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생활상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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