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 생각했는데…우리 안엔 이미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9일 16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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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장르가 있다. 코미디언이 홀로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관객을 웃기는 코미디다. 처음 접한 건 친구의 자기소개 문구였다. “인생 삼모작을 위해 틈나는 대로 넷플릭스를 보며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마중이다.” 당시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하던 때였고, 눈 밝은 이들이 하나 둘 빠져들던 시기였다. 그곳엔 한국 TV에선 볼 수 없던 이야기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한국 예능은 누군가를 놀림감으로 만들어 웃기는 데 익숙했다. 뚱뚱하다고 놀리고, 못생겼다고 놀리고, 이혼했다고 놀리고, 키 작다고 놀리고. 이 분위기에서 개그 캐릭터로 살아남으려면 무례에 가담하거나, 스스로 우스운 사람이 되어야만 했고, 나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롤모델이 생겼다. 넷플릭스의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가득 메운 관객들의 환호 속에 등장하는 호주의 레즈비언 코미디언 헤나 개즈비는 선언한다. 여성이자 성 소수자인 자신은 그 동안 자학하는 코미디로 경력을 이어왔으나, 이것이 여성혐오적 구조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하지 않을 거라고. 순간 내 주변에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우리도 한번 해 볼까?

그리하여 열게 된 스탠드업 코미디언 꿈나무 발기인 대회. SNS에 올리니 5명이 신청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너무 두려워서 세상에서 제일 안 웃긴 사람이 된 기분에 휩싸였다. 일단 돌아가며 소개를 했다. 함께 웃긴 영상을 봤다. 대본 써오기 숙제를 내고 헤어지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가 거기 맞죠?” “네” “그럼 오늘 돌아가면서 하는 건가요?” “네?”

알고 보니 누가 오늘 직접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줄 알고 찾아온 거였다. 우리는 당황하며 “못 한다”고 식은땀 흘리자 그가 갑자기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제가 글방을 오래 다녔는데요 거기서 하는 일이라곤 각자 글을 쓰고 봐주는 게 다였어요. 글이든 코미디든 실력이 느는 방법은 직접 해보는 거 밖에 없지 않을까요?” 결국 우리는 몸풀기 게임을 통해 순서를 정한 뒤 한명씩 무대로 나와 스탠드업 코미디를 해보기로 했다. 한 친구가 할머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할머니는 올해 90세인데 사소한 면에서 진짜 이기적이야. 예를 들어 맛있는 반찬이 나오잖아? 그럼 보통의 할머니들은 내 새끼 더 먹어 하면서 챙겨주잖아~, 그런 거 절대 없어. 무조건 반으로 딱! 나눠서 자기 앞에 들고 가. 그러면서 뭐라는 줄 알아? 니네는 앞으로 먹을 날이 많대! 이상할 할머니지?” 그러면서 용돈 보내드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월급날이 25일인데, 아침부터 전화가 와. ATM기 앞인데, 네가 용돈을 안 보내줘서 내가 국밥을 못 먹는다고. 할 수 없이 하루 전날 자동이체를 걸어놨는데 글쎄~” 하며 이야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 객석에서 누가 울기 시작했다.

“우리 할머니는 87세인데 10년 동안 집에만 있있어요 ㅜㅜ.” 그러니까 걔는 한번도 할머니가 혼자 ATM에 가는 상상을 한 적 없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던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무대 위에 코미디언도 할머니를 떠올리며 울기 시작했다.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우리 안엔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웃기면서 슬펐고, 슬프면서 웃겨서 우리는 울다 웃다 했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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