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동정민]“국회의원 월급 줄이자”… 佛은 지금 ‘정치 용광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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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프랑스 시민으로 국가에 기여하고 싶어 나왔습니다.”

프랑스 파리 11구에 사는 30대 제롬 씨는 12일 오후 7시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11구 구청으로 향했다. 대국민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제롬 씨는 “토론 주제인 생태적 전환(환경 문제)은 국가적으로 정말 중요한 사안”이라고 했다.

이날 11구 구청은 제롬 씨처럼 국가에 기여하려는 구민 200여 명으로 북적거렸다. 연령과 성별도 다양했다. 이들은 입장 순서대로 6∼8명씩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을 시작했다. 유일한 혜택은 구청에서 준비한 주스 한 잔. 돈을 받는 것도, 자신의 의견이 반드시 정부 정책에 반영된다는 보장도 없다. 토론 후 A4 종이 한 장에 의견을 적어 낼 뿐이다. 그런데도 일과를 마친 시민들이 피곤함을 잊은 채 낯선 사람들과 환경 문제를 토론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번 토론회는 시작 한 달여 만에 프랑스 전국에서 4300건이 넘게 진행됐다.

하루 살기도 팍팍한 세상이지만 국민이 예전보다 더 나라를 걱정하는 건 전 세계적 흐름이다. 이른바 대의민주주의, 내가 투표로 뽑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못 믿겠다는 불신이 팽배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해 11월부터 프랑스를 휩쓸고 있는 ‘노란 조끼’ 시위대는 대통령,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을 국민투표로 끌어내릴 수 있는 시민 주도형 국민투표제 도입을 요구한다.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3선으로 연임을 제한하자는 마크롱 대통령의 개헌안에 대한 지지율도 80%에 육박한다. 대통령 개인 지지율이나 다른 정책에 대한 지지율보다 훨씬 높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파리지앵은 “국회의원은 월급으로 최대 8434유로(약 1079만 원)를 받는다. 의원 임금을 최대 최저임금의 5배로 제한하면 매년 세금을 250만 유로(약 32억 원)나 아낄 수 있다”며 이를 대국민 토론회 주제로 제안했다.

극우 동맹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이탈리아 제1당 오성운동은 당의 주요 정책을 온라인 당원투표로 정한다. 소속 의원은 반드시 그 결과를 따라야 한다. 오성운동은 연정 파트너인 마테오 살비니 동맹당 대표가 난민 감금 혐의로 기소 위기에 처하자 살비니의 면책특권 보장 여부를 당원투표에 부쳤다. 그는 지난해 8월 지중해에서 구조된 난민들의 하선을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반(反)부패를 기치로 내건 오성운동은 의원들의 면책특권에 반대해 왔다. 하지만 오성운동 당원 59%는 “살비니의 면책특권을 보장하라”고 했다. 그가 기소되면 동맹당과의 연정이 무너져 정권을 뺏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결과에 따라 오성운동 의원들은 19일 상원 투표에서 살비니 대표의 기소를 막았다. 면책특권 보장의 적절성 논란이 있지만 오성운동 당원들이 소속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은 온라인에서 형성된 여론이 정책 입안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간 국민은 위정자에게 불만이 많더라도 “뽑은 내 손이 잘못”이라며 한탄하다가 마지막에 거리로 뛰쳐나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젠 참을 필요가 없어졌다. 정치 참여 창구가 무궁무진하다. 누구나 유튜브로 새로운 여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정책 국민투표도 활성화했다.

뒤집어보면 그만큼 국민도 피곤하고 나라도 피곤하다는 뜻이다. 퇴근 후에 쉬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보다 토론회에 참석하거나 청원하면서 나라 걱정을 해야 하니까. 목소리가 큰 극단적 세력들이 증오나 맹신으로 국민을 선동할 우려도 커졌다. 그래도 세계의 흐름이 그렇다면 할 일이 많아진 국민이 더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기회이자 위기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프랑스#토론회#노란 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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