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지상에 없는 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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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없는 잠 ―최문자(1943∼)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찬 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젯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명절은 ‘나’보다 ‘우리’가 되어 사는 시간이기 쉽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참 다정하고 좋다. 여럿이 모여 우리가 되면 마음은 든든하고 가슴은 따뜻해진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모이면 다툼도 일고 상처도 받고 염증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든든하고 따뜻한 말이지만, 서로 부대끼며 살다 보면 무리를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최문자 시인의 ‘지상에 없는 잠’은 떠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은 ‘우리’가 아니라 ‘나’로 돌아가야 함을 아름답게 강조하고 있다. 다시 ‘나’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미 많은 상처로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짐작건대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나 보다. 한 장의 나뭇잎을 차지하려고 ‘지상의 입들’이 서로 싸운다고, 시인은 썼다. 이 땅은 ‘짐승 냄새’를 풍기는 속된 일로 가득하다고, 시인은 썼다. 견디기 힘든 탓에 그들과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갈까. 이곳을 떠나는 것이 가능할까. 시인은 자신이 속한 모든 현실을 떠나기 위해 원고지로 돌아와 시를 썼다. 시 안에서 비로소 혼자만의 방을 찾고 그 안에 자기 자신의 영혼을 뉘여 쉬게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꽃나무’의 의미이다. 시를 한번 읽어보자. 여기에는 처연하게 병든 영혼을 정갈한 상상 나무의 가지에 걸어두는 한 여인이 보인다. 그 영혼은 상처 입었지만 정갈한 나무에서 쉬면서 스스로의 정화 능력으로 상처를 치유해갈 것이다.

누구든 세상과 멀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심지어 가족과 연인으로부터도 자신을 격리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것은 성정이 뾰족하거나 예민해서가 아니다. 혼자만의 방에서야 숨통이 트이는 것은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이 시를 읽자. 아픈 영혼의 자정 능력을 믿어보자. 때로 외로울 필요가 있다.

나민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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