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다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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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이득영 씨가 헬기를 타고 촬영한 ‘성수대교’.
사진가 이득영 씨가 헬기를 타고 촬영한 ‘성수대교’.
다리
신경림(1935∼)

다리가 되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스스로 다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내 등을 타고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는 꿈을 꾸는 날이 있다
꿈속에서 나는 늘 서럽다
왜 스스로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남만 건네주는 것일까
깨고 나면 나는 더 억울해지지만

이윽고 꿈에서나마 선선히
다리가 되어 주지 못한 일이 서글퍼진다


금붕어와 동거하는 소심한 남자는 팔리지 않은 책들을 재생용지로 쓸 수 있게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한다. 책 파쇄기에서 목숨을 건진 낱장을 챙겨와 그는 날마다 출근길 전철에서 소리 내어 읽는다. 뜻밖에 승객들이 두서없는 글에 귀를 기울인다. 어느 날 할머니 승객이 요양원에서 낭송해달라고 부탁한다. 망설임 끝에 시작한 일로 무기력했던 노인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생기와 활력이 넘쳐흐른다. 더 큰 변화는 스스로에게 찾아왔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모처럼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꼈다”고 고백한다. 프랑스 소설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은 다른 이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 기쁨으로 돌아온다는 평범한 이치를 보여준다.

애플의 최고 경영자인 팀 쿡이 얼마 전 커밍아웃을 선언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텐데 세계 시가총액 1위를 자랑하는 대기업의 총수가 굳이 자신의 성적 취향을 고백한 이유는 뭘까. 힘들어하는 다른 성적 소수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 결심에 영향을 준 것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남긴 질문이다. “인생에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절박한 질문은 ‘당신은 남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것이다.”

쉽지 않은 결단을 하기까지 팀 쿡의 마음에도 신경림 시인의 ‘다리’에서 보듯 엇갈린 생각이 공존했을 터다. 어째서 내가 다른 사람을 건네주는 다리가 되어야 하는지 억울한 심정과, 꿈속에서조차 내 어깨와 등을 남을 위해 선선히 내주지 못하는 속 좁은 자신에 대한 탄식. 우리처럼 평범하고 세속적인 사람에게는 그래서 더욱 작품 속 화자의 고민이 가슴을 파고든다.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 25위에 선정됐다는 소식이다. 영국의 한 연구소에서 나라별로 8개 분야의 점수를 합쳐 매긴 순위다. 한국의 경우 경제, 교육 등 6개 항목에 상위권에 올랐으나 공동체 구성원들의 협력 등을 측정한 사회적 자본의 순위는 뒤로 처졌다. 전체 순위는 작년보다 한 단계 상승했지만 눈길 끄는 대목이 있었다. “지난달 낯선 이를 도운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세계 평균 이하로 나타났다.

영화 ‘버킷리스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가면 신에게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단다.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와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대답에 따라 천국과 지옥행이 결정된다. 언제나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세상. 그래도 우리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빌어주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길 희망한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겠다는 꿈을 실천하진 못해도 누군가 필요로 할 때 기댈 수 있게 곁을 내주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등과 어깨를 밟고 강을 건너왔을 내가 오늘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남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성수대교#다리#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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