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필요 없다”…비행기모드 켜고 인간관계 줄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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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금·단톡방 피로에 “관계도 가성비” 공감 확산

직장과 SNS에서의 관계 피로가 커지면서 혼자 OTT나 콘텐츠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직장과 SNS에서의 관계 피로가 커지면서 혼자 OTT나 콘텐츠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금요일 저녁이면 휴대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 둡니다. 주말 내내 친구들을 만나느니 혼자 OTT를 보는 게 훨씬 편하거든요.”

서울 광화문의 한 IT기업에 근무하는 김진호 씨(34·가명)는 최근 10년 넘게 이어온 고교 동창 단톡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특별한 갈등은 없었다. 그저 인간관계에 쓸 시간과 에너지가 바닥났다는 느낌이 더 컸다.

비단 김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결이 과잉된 시대, 인간관계를 스스로 줄이려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SNS에서는 “친구 없어도 괜찮다” “인간관계도 다이어트한다”는 글이 공감을 얻고 있다. 사람을 싫어해서라기보다, 관계 유지에 필요한 시간과 감정, 비용을 줄이려는 흐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 “만나는 것도 일”…관계에 지친 사람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인간관계를 두고 “관리 비용”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약속 시간을 맞춰야 하고, 상대 감정에 신경 써야 하며, 식사나 술자리 비용도 적지 않다. 여기에 결혼식 축의금이나 각종 모임 비용까지 더하면 부담이 커진다.

김 씨는 “예전에는 친구를 많이 만나는 것이 활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에너지가 소모되는 느낌”이라며 “사람을 싫어해서라기보다 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은 단순한 개인주의 확대만으로 보긴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회적 연결이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관계 피로가 누적됐다는 것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사회적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오는 피로감에 대한 반작용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며 “관계 피로가 일차적인 원인이고, 특히 젊은 층에서는 개인주의 흐름과도 연결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관계를 ‘비용과 효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분위기도 강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친구 사이를 어느 정도 의무나 정서적 책임으로 유지했다면, 최근에는 시간과 비용 대비 만족감을 따지는 경향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고물가와 경기 불안, 개인화된 생활환경이 겹치면서 사람들이 ‘이 관계가 내게 충분한 안정감과 즐거움을 주는가’를 자연스럽게 계산하게 됐다”며 “인간관계 역시 하나의 자원 배분 대상으로 인식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깊은 관계 대신 ‘가벼운 연결’

류채우 씨가 직접 주최한 경도 모임에서 참가자들이 실제로 경찰과 도둑 게임을 진행하는 모습. 시골쥐 스레드 갈무리
류채우 씨가 직접 주최한 경도 모임에서 참가자들이 실제로 경찰과 도둑 게임을 진행하는 모습. 시골쥐 스레드 갈무리


관계를 완전히 끊기보다, 느슨하고 목적 중심의 관계를 선호하는 흐름도 나타난다.

실제로 최근 서울에서는 성인들이 모여 ‘도둑과 경찰’ 놀이를 하는 이른바 ‘경도 모임’도 인기를 끌고 있다.

관련 모임을 운영하는 류채우 씨는 “직장인이나 대학생들이 깊은 인간관계에 대한 부담 없이 가볍게 즐기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편하게 느끼는 것 같다”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이른바 ‘느슨한 연결(weak ties)’이 확대되는 현상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친밀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보다, 취미나 활동을 중심으로 필요할 때 연결되는 방식이다.

임 교수는 “과도한 연결이나 노출 부담이 적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모임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고립되지는 않으면서도 사생활 침해를 줄이고 목적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느슨한 연결 문화는 앞으로도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름이나 직업, 개인사를 깊게 공유하지 않아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도 이런 모임의 특징으로 꼽힌다.

김시월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개인화된 사회에서는 관계 역시 기능적·심리적 효용을 기준으로 선택되는 경향이 나타난다”며 “취미나 목적 중심 네트워크가 늘어나는 것도 이런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 “잘 지내야 한다는 압박”…SNS 시대의 관계 번아웃

직장과 SNS에서의 과도한 연결이 오히려 인간관계 피로를 키운다는 지적도 나온다.

회사에서는 업무상 소통이 이어지고, 퇴근 뒤에도 SNS를 통해 타인의 일상과 관계가 끊임없이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내가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비교 문화까지 더해지면서 관계 자체를 감정 노동처럼 느끼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직장과 SNS에서 과도한 연결이 많아지면서 ‘잘 소통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담이 늘어났다”며 “온라인 관계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도 번아웃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SNS에서 인간관계 스트레스를 뜻하는 ‘관계 번아웃’,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한다는 ‘손절’ ‘관계 다이어트’ 같은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이는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 교수는 “행동경제학적으로 사람들은 이익을 얻는 것보다 손해를 피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며 “최근에는 스트레스나 감정 소모가 큰 관계를 유지하기보다 관계를 정리해 심리적 손실을 줄이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친구 대신 OTT…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운 시대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 쉬워진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OTT와 게임, 배달 서비스, 1인 취미 플랫폼 등이 늘어나면서 굳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과거에는 영화나 식사, 취미 활동을 위해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혼자서도 충분히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졌다.

이 교수는 “디지털 플랫폼이 ‘혼자서도 불편하지 않은 생활’을 가능하게 하면서 인간관계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사람을 만나야 얻을 수 있었던 위로나 재미를 디지털 서비스가 일부 대체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관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많다.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디지털 환경이 확대되더라도 인간관계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관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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