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3>프로골퍼 박지은의 ‘청국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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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전쟁… 여자의 행복 이제야 느껴요”

가냘파 보이는 왼쪽 손목에 큼지막한 롤렉스시계를 차고 있었다. “첫 우승 기념으로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준 거랍니다. 아빠에게 선물했다 찾아왔어요.”

시계 안쪽을 살펴보니 ‘2000. 6. 4’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의 미국 진출 1세대 스타로 이름을 날리다 지난해 6월 전격 은퇴했던 박지은(34)이었다. 그를 만난 건 20일 인천 스카이72GC 오션코스. 그는 이날 끝난 미국 LPGA투어 하나외환챔피언십에서 은퇴 경기를 치렀다.

지난해 11월 초등학교 선배인 김학수 씨(39)와 12년 연애 끝에 결혼해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그가 은퇴경기를 갖기로 결심한 건 지난달이었다. 골프로 웃고 울던 가족을 위한 헌정 무대를 갖고 싶었다. 남편의 권유도 든든한 힘이 됐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기회가 생겨 감사해요. 결혼 후 골프채 전혀 안 잡았는데 5주 동안 운동하면서 입안이 다 헐었어요. 예전엔 몇 배 고된 훈련을 하고도 끄떡없었는데. 쌍코피 터지기 직전이에요(웃음).”

박지은이 서울 강남의 유명 갈비집 삼원가든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골프에 입문한 뒤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88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

“애리조나 학교 다닐 때 아시아계는 나와 중국계 두 명밖에 없었어요. 오후 3시 반에 수업 끝나면 골프장에서 해질 때까지 공을 치는 생활을 6년 동안 되풀이했어요. 부모님이 어두워지기 전엔 귀가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친구 사귈 틈도 없었어요. 외로워도 어떻게 풀지 몰랐죠.” 그래서 해가 짧은 겨울을 좋아하게 됐다는 박지은. 사춘기도 대학 진로를 결정하고 주니어 대회 출전을 끝낸 고3 2학기 때 뒤늦게 찾아와 방황했단다.

힘들 때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던 박지은은 그런 뒷바라지와 정성 덕분에 아마추어 시절 통산 55회나 우승하며 최강으로 군림했다. 1999년 애리조나 주립대 중퇴 후 프로로 전향한 뒤 미국 LPGA투어에서 통산 7승(메이저 우승 1회)을 거뒀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허리와 목, 고관절 등 잦은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좌절을 겪었다.

“대회 때 18홀 라운드를 마치고 휴대전화 전원을 켜면 엄마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어요. ‘오늘 하루도 끝났네. 고생했다’ 뭐 이런 식으로요. 미국 오후 시간이 한국에선 새벽이잖아요. 내 스코어가 바로 그날 우리 집 날씨를 좌우했어요. 잘 치면 맑음이고 엉망이면 아침 밥상부터 분위기 꿀꿀하고 짜증도 내셨대요.”

박지은의 아버지는 심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자나 깨나 딸 걱정을 하던 어머니는 몇 년 전 유방암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받았다. 힘겨운 항암 치료 과정을 겪으면서도 만리타향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딸에게 매일 문자 보내는 일을 잊지 않았다. “엄마에게 우승 트로피를 드리고 싶었는데. 결국 못했네요.”

박지은은 자신에게 골프는 전쟁이었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화려하고 멋져 보였지만 25년 동안 오로지 골프만 하면서 여러 가지 풍파를 겪었어요. 대회에 나가면 한번도 즐긴 적이 없었어요. 스트레스와 성적에 대한 부담이 끊이지 않았죠. 슬퍼서 울고 열 받아서 울고….”

34세와 은퇴경기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한국 여자 프로 골퍼들은 30대에 접어들면 이미 황혼기 취급을 받는다. 그만큼 수명이 짧다. 박지은은 “어려서부터 혹독한 과정을 거치기에 쉽게 지친다. 그래도 정상의 순간을 지속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승 한 번 했다고 최고가 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박지은은 통산 550만 달러(약 59억 원)의 상금을 벌었다. 처음 받은 상금 액수를 물었더니 “188달러였다”고 정확한 액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랜 공백 탓에 이번 은퇴 경기 성적(77위)은 신통치 않았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부모님과 지인들의 응원 속에 소풍이라도 나선 듯한 모습이었다. 프로골퍼로서 마지막으로 받은 상금(3474달러·약 370만 원)은 의미 있게 쓰려고 고민하고 있단다. 앞으로 가정에 충실하면서 골퍼로서 4반세기 동안 쌓아온 경험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써보고 싶다는 게 그의 포부.

아마추어 시절 59타를 쳤고 프로에서도 61타가 베스트스코어인 박지은은 “11개월 차 주부로서의 스코어는 83타 정도”라며 웃었다. “손님 한번 치르려면 집안에 폭탄이 터졌죠. 이젠 요령이 생겼어요. 착착 정리하면서 요리할 줄도 알고요. 원래 꿈이 현모양처였거든요.” 남편 아침도 꼬박꼬박 챙겨준다는 그는 요즘 운동하느라 주스로 때울 때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믹서에 안 갈아본 게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박지은이 첫 손가락으로 꼽는 음식은 뭘까. 뜻밖에도 청국장이었다. “일단 다시마 멸치로 국물을 제대로 내고 고추장도 좀 풀죠. 여기에 양파, 브로콜리, 파프리카, 김치, 마지막으로 두부를 엄청 넣어요. 건강식이에요. 요즘 냄새가 안 나는 청국장도 있던데 일단 냄새는 좀 나줘야죠.” 운동밖에 몰랐던 며느리를 미덥지 않게 보던 시부모님을 안심시킨 것도 청국장이었다. “결혼 초기 집에서 저녁 대접을 해드렸는데 국물 맛을 보시더니 아들 믿고 맡겨도 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빨리 손주도 안겨드려야 하는데…. 딸이면 골프도 시켜볼까 해요.”

박지은의 영어 이름은 그레이스(Grace)다. 필드에서 도도한 이미지로 유명했던 박지은에게 구수한 삶의 냄새가 풍겼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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