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살인의 추억’에서 통영의 아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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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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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사회부장
이기홍 사회부장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는 아버지가 나오지 않기를….”

초등학생 딸을 잃은 아버지는 슬픔을 억누르며 염원했다. 성범죄 전과자 김점덕에게 지난달 살해된 통영 아름이의 아버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의 염원이 이뤄지기 힘들 것임을. 아름이 아버지 이전에도 소중한 딸을 변태성욕자의 수욕(獸慾)에 잃은 여러 부모들이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부모가 더는 나오지 않기를 기원했다. 온 사회가 함께 울면서 “다시는…”을 외쳤다.

흉악범죄 대책,시간 지나면 흐지부지

여성·어린이 대상 흉악범죄에 대한 과거의 언론보도 스크랩을 찾아보면서 부끄러웠다. 김점덕 사건 보도를 보노라면 2010년 김길태 사건 직후의 기사 스크랩을 보는 것 같다. 2010년 보도는 그 이전 사건 스크랩인 듯하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우리 사회는 반성하고 고함치는 일을 되풀이해 왔다. 성범죄 전과자 대다수가 전자발찌 착용 대상에서 벗어나 있으며, 신상공개가 동(洞)밖에 나오지 않으며, 아동음란물이 마구 방치돼 있음을…마치 몰랐다는 듯이.

이번에도 시간이 지나면 ‘피의자 인권’ ‘현실적 어려움’ 등의 소리가 슬슬 흘러나오고, 요란했던 대책들은 흐지부지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미 여러 건의 여성·아동 대상 범죄를 미해결 상태로 묻어버렸다. 화성연쇄 살인(1986∼1991년), 개구리소년(1991년), 이형호 군 유괴살인(1991년) 사건 등은 온 국민이 관심을 쏟았지만 수사당국은 진상 규명을 포기하고 파일을 봉해버렸다.

물론 이들 사건은 2006년에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여론의 끈질긴 요구로 법무부는 살인죄 공소시효를 없애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6월 13일 입법 예고했지만 공소시효가 아직 만료되지 않은 범죄에만 적용되므로 화성사건 등은 해당이 없다.

공소시효가 이미 끝난 사건에 대해 공소시효 폐지를 적용하는 건 형벌불소급 원칙에 위배된다는 게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하지만 헌법의 형벌불소급 조항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 행위로 소추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행위시에 처벌되는 법이 있었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형사상 처벌할 수 없는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법무부와 다수 법학자는 형벌불소급은 공소시효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해석하지만 행위의 가벌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공소시효에 관한 규정은 형벌불소급 원칙의 효력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공소시효가 끝난 행위에 대한 소급 처벌이 위헌인가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1996년 5·18민주화운동특별법 위헌제청 사건 심판에서 합헌결정을 내렸다. 당시 5 대 4로 한정위헌 의견이 많았지만 위헌결정 정족수가 되지 않았다.

화성사건 등을 공소시효 배제 대상에 포함시켜 재수사해야 한다. 위헌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런 논쟁 자체가 흉악범죄에 대한 준엄한 처벌 의지를 담금질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화성사건 등 공소시효 배제해야

이들 사건은 각각 ‘살인의 추억’ ‘아이들’ ‘그놈 목소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화로만 끝낼 일이 아니다. 이들 사건의 진상 규명은 뉴욕경찰이 1979년 실종된 소년의 살해범을 33년 만인 최근 검거했듯이 우리 사회에서도 아동·여성 상대 범죄는 반드시 처벌한다는 공동체적 믿음을 확고히 하는 의미가 있다. 여전히 활보하고 있을 범인들로부터 현재와 미래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사이코패스가 범행을 자기 스스로 멈추는 경우는 절대 없다는 게 범죄 전문가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전자발찌, 성범죄자 신상공개 등 그나마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보호장치들은 숱한 어린이와 여성의 희생이 거름이 되어 피어난 결과물이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지금의 다짐이 흐지부지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억울한 넋들이 눈을 감을 것이다.

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
#살인의 추억#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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