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돼온 국제질서를 무너뜨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지난 세기 옛 소련은 공산당 일당독재와 국가 소유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체제하에서 사회주의 실천 운동을 전개했다. 초기에는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등 성과를 내는 듯했으나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산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체제의 종말을 고했다. 이로 인해 군비경쟁을 축으로 한 냉전체제는 막을 내렸고, 새로운 국제질서하에서 세계 각국은 총성 없는 기술전쟁에 본격 돌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로 세계 각국은 기술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뿐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첨단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개발된 기술은 국가의 존립과도 연계돼 있어 이를 보호하고자 제도적·조직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 29건에 불과했던 산업기술 유출이 점차 증가해, 집계된 누적건수만 264건으로 대략 350조 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엄청난 규모의 산업기술 유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11년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46건으로 최근 7년 중 가장 많은 건수를 기록했다. 이는 우리가 많은 첨단기술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술 보호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산업기술 유출이 증가할수록 이에 따른 분쟁도 증가할 것이다. 그런데 산업기술이 유출됐을 때 발생하는 분쟁은 다른 분쟁과 구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산업기술 유출과 관련된 분쟁이 단순히 한 기업의 흥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국부 유출과 관련된 분쟁이 된다는 것이다. 산업기술 유출의 분쟁과 관련해서는 기업 차원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보호 및 분쟁 해결 지침이 마련돼야 하는 이유다.
주목할 것은 첨단 산업기술이 유출돼 분쟁 대상이 되는 경우 대개 재판의 심리 과정 및 판결이 공개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산업기술은 국내외로 부정하게 유출되면 국가산업의 경쟁력이나 국가의 안전보장 및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재판의 심리 과정 및 판결이 공개되지 않아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애써 보호하는 기술이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다면 그런 보호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송 절차에서 생성되거나 교환되는 정보의 비밀이 유지될 수 있도록 관련 제도가 요구됐고, 이에 따라 ‘비밀유지명령제도’가 마련됐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따라 이러한 비밀유지명령제도가 특허법을 비롯한 상표법, 저작권법, 부정경쟁방지법 등에 도입되었다.
문제는 지식재산의 한 축인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유출방지법)’에는 비밀유지명령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행 산업기술유출방지법 제23조에 따르면 산업기술의 유출에 대한 분쟁을 신속하게 조정하기 위해 지식경제부 장관 소속하에 산업기술분쟁조정위원회를 둘 수 있게 되어 있다. 산업기술 유출과 관련한 분쟁의 조정을 원하는 사람은 조정신청서를 조정위원회에 제출해 분쟁 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 조정위원회는 3개월 이내에 심사해서 조정안을 작성하고, 이를 양 당사자가 받아들이는 경우 조정안은 재판상 화해와 같은 효력을 갖게 된다. 산업기술 유출에 대해 조정이라는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재판상 심리 과정이나 판결문의 공개로 발생할 수 있는 산업기술 유출을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면서도 양 당사자가 만족할 수 있는 분쟁 해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행 산업기술유출방지법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음에도 아직껏 구성되지 않은 산업기술분쟁조정위원회를 속히 만들어 국가 핵심 산업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제도는 첨단기술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기술 분쟁을 해결할 수 있어 기술 보유자에게도 유리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는 산업기술 유출이 국가나 기업의 존립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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