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지명훈]정부가 못한 일 지방외교가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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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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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훈 사회부 차장
지명훈 사회부 차장
2005년 10월 26일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실에서 이 단체와 ‘평화헌법을 지키는 구마모토(熊本) 현민의 회’ 등 일본의 시민단체가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구마모토 현의 모든 중학교가 2001년에 이어 2005년에도 한국사를 왜곡한 후소샤(扶桑社)판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않은 것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한일 시민단체는 그동안 왜곡 교과서 채택 저지 운동을 공동으로 벌여왔다. 일본 전체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의 채택률은 2001년 0.039%, 2005년 0.39%였다.

구마모토 현은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이 짙은 데다 한국과 악연이 많아 후소샤판 교과서가 무더기로 채택될 우려가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시 결과는 더욱 의미가 컸다. 구마모토 현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주도한 낭인 37명 중 21명의 출신 지역이고 청일, 러일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당시 일본 측 대표인 미야가와 스네노리(宮川經範) 목사는 “일본에서 가장 보수적인 구마모토 현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기적”이라며 “교과서 채택 저지에 도움을 준 충남도와 시민단체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런 결과는 그의 말처럼 양국의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가 협력한 ‘지방외교’의 승리라는 시각이 많다. 지방외교란 지방정부가 국제무대에서 국가외교를 지원하고 보완하거나 시정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서 지방정부는 지자체뿐 아니라 지방의회, 시민, 문화, 사회, 종교단체 등 비(非)중앙정부를 통칭한다. 학계에서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에는 국가 이념이나 논리에 충실한 중앙정부보다 보편적 가치와 양심의 논리에 따르는 지방정부의 외교가 오히려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양국 정부와 정치권이 갈등만 일으키는 사이에 구마모토 현과 자매결연한 충남도와 도의회, 충남도교육청,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충남역사교사모임은 왜곡 교과서 채택 저지 운동을 벌였다. 충남도지사와 도의회 의장은 협조 서한을, 도교육감과 교사, 학생들은 간곡한 호소 편지를 보냈다. 또 도교육청과 시민단체는 구마모토 현과 교육위원회, 시민단체를 직접 방문해 “역사왜곡 교과서의 채택이 동북아 평화를 해칠 것”이라고 설득했다.

올해는 역사왜곡 교과서와 관련해 최악의 해였다.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는 최근 일본 내 이쿠호샤(育鵬社·후소샤의 자회사)의 역사교과서 채택률이 3.8%로 2001년보다 100배, 2005년보다 10배로 늘어 일본 우익의 목표치(5%)에 접근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구마모토 현 공립학교의 채택률은 0%(사립학교는 미확인)를 유지했다. 이번에도 교과서 채택을 앞둔 7월 초 충남도의회와 충남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한일교류충남네트워크 등이 현지를 찾아 저지 운동을 벌였다. 한일교류충남네트워크 김지훈 집행위원장은 “구마모토 현 내 지자체들이 우리의 방문으로 교과서 채택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고 털어놨다”며 “구마모토 현은 그 때문에 교과서 채택 결정이 일주일이나 늦어졌다”고 말했다.

지방외교 전문가인 대전대 행정학부 안성호 교수는 “구마모토 현과 충남지역 지방정부의 교과서 채택 저지 운동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지방외교의 모범사례”라고 말했다. 점차 심각해지는 한일 외교마찰과 같은 난제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가 한층 더 다양한 방안과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중앙정부가 하기 힘든 틈새 역할을 지방외교가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지방외교의 확산이 필요한 때다.

지명훈 사회부 차장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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