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마이스타일]반희선씨/야누스로 살기

  • 입력 2000년 2월 8일 20시 19분


▽장면1▽

토요일인 지난 달 29일 밤 10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S댄스클럽.

그가 춤춘다. 가지런히 편 양팔을 위아래로 움직인다. 흰색 브릿지가 선명한 머리칼이 어깨를 쓸고 지나가자 그는 허공을 향해 야하면서도 진지한 시선을 보냈다. 그의 눈은 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보여지기 위해서, 보여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데카당하게 빛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노랑색 야광 원피스, 그 무릎보다 훨씬 찢겨 올라간 트임을 사람들은 익숙해하는 표정이다. 외국인 연예인 아티스트 언더그라운드가수 등 200여명이 초청된 파티. 하드코어 테크노그룹 ‘사마디’의 댄서인 그는 30분간 테크노댄스를 선보이며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장면2▽

지난 달 31일 월요일 아침 9시, 서울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내 행정과.

보기만 해도 마음이 가라앉는 회색 투피스 차림의 그는 영국에서 보낸 외교행랑(파우치)이 제대로 도착했는지 점검하고 있었다. 또 영국 외교관이 승용차를 구입하기 위해 한국 외무부에 제출해야 할 서류를 작성. 외교관들의 호텔예약 상황과 집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서류 등을 꼼꼼히 체크했다.

▼야누스적인 삶▼

반희선씨(33)의 삶은 두 개다. 직장여성으로서의 삶과 테크노댄서로서의 삶. 두 삶은 각기 기름과 물처럼 한데 뒤섞일 수 없는 듯하지만, 그는 경계면에 아슬아슬하면서도 진솔하게 서있는 것 같다.

반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아침6시면 영어학원을 찾으며 영어의 바다에 빠졌다. 영어테이프는 너무 많이 들어 늘어지다 못해 끊어지기 일쑤.

국민대 사범대 가정교육학과에 입학. 그러나 자신의 기질이 ‘참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 졸업 후 독일계 무역회사와 특급호텔 비즈니스센터에서 근무하며 외국인들을 상대로 일해왔다. 93년 5월에는 2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영국대사관에 들어갔다.

반씨는 2년 전 대사관에서 열린 파티에서 자신에게 춤에 대한 ‘끼’가 있음을 알아챘다. 이후 주말에는 댄스클럽을 찾았다. 어떤 동작을 할 것인지 미리 계산하지 않았다. 그냥 음악에 몸을 맡겼다. 혼자 지칠 때까지 춤을 췄다.

춤은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통로라고, 춤을 추면 음악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와 머리 끝으로 전이돼가는 과정에서 엑스터시를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반씨는 자신을 우연히 목격한 테크노그룹에 의해 스카우트돼 작년 말부터 댄서로도 활약하고 있다.

―남의 시선을 끄는 것을 즐깁니까?

“당연하죠. 나는 야한 게 좋고, 남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야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솔직한 것,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것, 여자임에 충실한 것, 때로는 여우같은 것입니다.”

반씨는 “나는 ‘엄마’나 ‘누나’가 되기 위해서 보다는 ‘여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다. 여자로서의 매력을 지키기 위해 가꾸고 노력하는 과정이 그래서 그에겐 행복하다. 하루 200번씩 윗몸 일으키기. 기상과 함께 물과 찬 우유를 한잔씩 마신다. 섬유질이 많은 김치는 최대한 듬뿍.

―일할 때 춤 생각 안납니까?

“내 머릿속에는 스위치가 자리잡았습니다. 주중의 삶과 주말의 삶을 ‘딸깍 딸깍’하며 오갈 수 있는 스위치. 그래서 일할 때는 춤을, 춤출 때는 일을 완전무결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월∼목요일은 퇴근하면 바로 귀가. 영국에서 발행되는 잡지를 훑어보며 고급스런 영어표현과 상류층 매너를 익힌다. 그의 삶은 금요일 오후 5시반 퇴근과 동시에 마술처럼 변한다.

▼TGIF(Thank God It's Friday)▼

다음은 반씨의 금요일 오후 변신 단계. ①가로 1m, 세로 1.6m짜리 거울 앞에 선다. ‘나는 프로다’ ‘카리스마가 있다’는 자기암시를 반복. 그날 심리상태에 따라 15벌의 파티복(동대문 패션타운에서 벌당 4만∼10만원에 구입) 중 하나를 선택 ②옷색에 맞춰 하양, 야광 연두, 잉크블루, 오렌지 등 색깔의 브릿지를 머리에 착용 ③매니큐어는 사이키 조명을 효과적으로 반사하는 흰색으로 ④장 폴 고티에나 까르띠에의 남자향수(여자 것보다 흡인력이 있음) ⑤댄스 중 기분에 따라 갈아입을 옷을 한두벌 준비해 백에 넣는다 ⑥통굽이나 12㎝ 하이힐 ⑦발목까지 오는 점잖은 외투로 파티복을 완벽히 감싼 후 택시를 타고 출발. 반씨는 이런 변신이 ‘주중의 삶’에 더 강하게 투자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고 밝혔다.

―자신이 남자보다는 여자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고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내 모습에서 욕구불만을 해소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많은 여자들은 모험적인 삶을 꿈꾸기는 커녕 변신할 마음조차 갖지 못합니다.”

―당신의 변신을 눈에 거슬려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무엇을 하든 모든 사람을 다 해피(happy)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에 지쳐있는 몸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반씨의 삶은 ‘포스트 모던’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0과 1로 구성되는 디지털문명의 ‘자식’인 테크노음악을 통해 자유로워진다는 점에서 동시에‘모더니즘’이다.

<이승재기자>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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